나도 뭔가를 그리고 싶었던 시절
나는 남들과는 조금 다른 유년을 보냈다.
시골에서 할아버지, 할머니 품에 살다가 초등학교 입학 전에야 아빠가 있는 서울로 올라왔다.
일곱 살이 끝나갈 무렵에야 ”아빠“라는 사람의 얼굴, 목소리를 인식하고 아빠가 소개해준 “엄마”라는 존재가 처음으로 생겼다.
나는 유치원에 다닌 적이 없다. 그저 학교 가기 위해 그 당시 유행이던 주산학원과 웅변학원을 몇 달 다닌 게 내 유년시절 사교육의 전부다.
어린 시절 누구나 한 번쯤 문턱은 넘어 본다는 피아노 학원이나 미술학원은 내게 사치였던 것 같다.
나중에 엄마가 교회에 있는 피아노 선생님께 나를 잠깐 맡겼다. 하지만 나보다 늦게 피아노를 시작한 동네 친구가 왼손 진도를 더 빨리 나가며 나를 놀렸다.
그 바람에 바이엘 상권의 몇 페이지만 배우다 피아노를 때려치웠다.
(50이 가까워지는 요즘도 그때 내가 부끄러움과 질투를 참았으면 지금쯤 피아노를 칠 수 있지 않았을까 상상하곤 한다.)
그래서였을까? 엄마는 내게 미술학원 다니고 싶냐는 이야기는 물어보지 않았던 것 같다.
어려운 형편에 보내준 학원을 너무 쉽게 때려치워서… 진짜 그런 이유였을 수도 있고 혹은 다른 이유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지금에서야 든다.
일곱 살 후반에 엄마가 사준 공주색칠놀이에 색연필로 끄적였던 게 나의 최초의 미술이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해 보니 미술 시간에 과학의 날 기념 ”내가 꿈꾸고 상상하는 미래“를 그리는 시간이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큰 스케치북에 뭔가를 가득 그려야 한다는 부담감, 크레파스와 물감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몰라 주눅 들었던 내가 있었다.
미술 시간이 돌아오는 게 싫었다. 차라리 개미처럼 작아져서 교실 마룻바닥틈에 숨어있고 싶었다.
고학년이 되니 ”자나 깨나 불조심“, ”안전벨트는 생명벨트“ 이런 포스터를 그려 제출하는 숙제가 있었다.
글자 수에 맞춰 칸을 분배하고 자를 이용해 글자를 규격에 맞게 스케치해야 했다.
간격이 잘 맞지 않아 스케치북이 찢어질 정도로 지우고 다시 그리는 과정을 수차례 반복해야 했다.
포스터물감으로 글자 안을 삐져나오지 않게 색칠하고 그러다 어긋나면 배경을 또 덧칠하고 배경을 칠하다 글자를 건드리면 다시 글자를 덧칠하고…
나는 거의 울다시피 그림을 겨우 완성할 수 있었다. 포스터의 삐뚤한 글씨체는 미술자체에 대한 내 마음도 삐딱하게 만들었다.
어린 나에게 미술은 규칙과 틀에 얽매인 짜증 나는 숙제, 빨리 해치우고 싶은 과제일 뿐이었다.
중고등학교 때도 마찬가지였다. 소묘, 데생 같은 미술 기초 수업은 나를 더 힘들게 했다.
‘이런 기초적인 형태도 못 그리는데 그림은 무슨 그림이야. 그림 잘 그리는 애들은 정말 좋겠다.‘
‘난 정말 그림에는 소질도 없어… 그림은 역시 타고난 애들만 그리는거구나…’
그렇게 나의 미술에 대한 거리감은 커졌다.
이른 나이에 결혼하고 아이 넷을 키우면서 내가 이루지 못한 피아노나 미술에 대한 꿈을 아이들에게 투영했다.
‘악기는 하나쯤 다뤄야 취미도 생기고 스트레스 풀거나 위안을 받고 싶을 때 좋지 않을까?‘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어야 좀 더 창의적으로 사고를 확장하고 다른 사람들과 아이디어를 공유하기 편하지 않을까?’
하지만 엄마 뜻대로 미술학원을 다녀준 아이는 한 명도 없었다.
이제 24살이 된 첫째 딸은 고등학교 때 처음 취미로 그림을 그려보겠다며 노트북에 연결해서 쓰는 그림패드를 사달라고 했다.
그림에 대한 기초가 전혀 없는 상태로 아이는 그림패드에 이것저것 그리며 시간을 보냈다. 그냥 그림판에 졸라맨 정도를 그리는 낙서 수준의 그림들이었다.
그러다 점점 그림에 투자하는 시간이 늘어나고 잠을 자지 않고 하루종일 책상에 앉아서 그림만 그리는 날이 늘어났다. 몇 년간 나한테 본인의 그림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고3이 되자 아이가 자신이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따라 그린걸 내게 자랑하듯 보여줬다.
뭘 모르는 내가 봐도 곧잘 그렸다. 대단해 보였다.
이때다 싶어 그림 쪽으로 진로를 고려하는 건 어떠냐고 물어봤다.
“엄마가 그런 얘기 꺼낼 줄 알고 그동안 안 보여 준 건데… ” 나는 보기 좋게 퇴짜 맞았다.
“너 누구 닮아서 이렇게 그림을 잘 그리는 거야? 정말 대단하다~~~”
“음… 엄마 닮지 않았을까? “
“응??? 나??? 나 그림 못 그리는데?”
“아니! 내 기억에 엄마 그림 잘 그리는데?”
“내가? 나 그림 그린적 한 번도 없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아니야. 어렸을 때 내가 엄마 노트에서 본 적 있어. 엄마 그림 그린 거.”
기억을 더듬었다. 내가 그림을 그렸다고?
전혀…. 나는 그림을 못 그리고 싫어하는데? 잘하고 싶은 마음은 물론 있지만 아예 아무것도 모르는데?
“왜 있잖아, 엄마 전화통화하면서 노트에 다가 그리던 거.”
“어??? 볼펜으로 끄적였던 낙서말이야?”
내 기억 저편에서 볼펜으로 꼬불꼬불 그렸던 나의 낙서가 꿈틀거리는 게 느껴진다.
“아핫… 그것도 그림이라면 그림인가? 그냥 낙서야. 나도 너처럼 잘 그리고 싶다. 그림 잘 그리는 사람 부럽다~”
“부러우면 엄마도 그려 봐요.”
“난 영 소질이 없는데…”
“나처럼 하루에 5~6시간 투자하면 되지 않을까?”
“……”
(미안. 난 그럴 시간도 열정도 없는데….)
늦었지만 나도 부러워만 하지 말고 그림을 배워볼까?
소묘가 뭔지, 원근법이 뭔지, 데생은 할 줄도 모르는데 내가 과연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사실 알고 보면 큰 딸처럼 내 안에 미술에 대한 재능이 있을 수도 있잖아?
그러다 문득….
저~~~~~~ 먼 과거 속의 어린 시절 이웃 할머니의 말이 떠올랐다.
“그래야… 에구.. 불쌍한 것. 엄마 얼굴 기억나니? 젖먹이인 너를 떼놓고 가다니. 네 엄마도 참 모질다 모질어…. 그래야, 엄마 보고 싶지 않아? 너희 엄마가 그림을 곧잘 그렸는데 너도 엄마 닮았으면 그림 잘 그리겠네~. 들리는 말로는 외가 쪽 친척 중에 화가가 있다고 하더라. 피는 물보다 진하다더니 그래서 네 엄마가 그림을 잘…”
휙! 나는 손에 들고 있던 길쭉한 나뭇가지를 멀리 던졌다. 나뭇가지로 마당 흙 위에 그렸던 낙서를 발로 쓱쓱 문질러 지우며 생각했다.
‘얼굴도 모르는 엄마를 내가 어떻게 닮아, 그림 그린 거 본 적도 없는데 잘 그리는지 못 그리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이 기억이 내가 생물학적 엄마를 기억하는 몇 가지 안 되는 단서 중 하나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막대기로 들쑤셔 놓은 저수지 밑바닥의 흙먼지처럼 뿌옇게 재생되자 문득 이런 생각이 떠다녔다.
‘아… 뭐야…. 이런 이유였어? 아빠가 나 어려서 미술학원 안 보내준 거. 화가는 배곯는다고 그림 그리는 거 다 헛짓이라고 했던 거. 혹시 떠난 첫사랑인 엄마의 모습을 내가 닮을까 봐?…‘
나는 순간 되게 억울해졌다.
이 나이 되도록 그림을 못 그리지만 잘 그리고 싶은 열등감에 사로잡힌 게 꼭 아빠 탓인 것만 같았다.
나 이제 그림 그리고 싶어.
그러니까 말리지 마. 아빠.
어차피 말리고 싶어도 하늘에 있으니 소용없겠지만.
나 이제 더 늦기 전에 시작해 볼래.
그렇게 나는 마흔다섯에 그림에 대한 열망을 용기 내 품어 보았다.
지금부터 시작하면 50대에는 뭐라고 그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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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딸이 어려서 제 노트에서 봤다고 말했던 그림이 아마 이런 거였을 거예요. (사실 낙서지만요)
제가 어린 시절 막내 고모의 연습장에 “지란지교를 꿈꾸며” 이런 시와 함께 장식되어 있던 꾸불꾸불한 선과 그 안을 채색한 형태의 테두리를 보고 혼자 연습하면서 놀았었거든요.
그 습관이 커서도 전화통화를 하거나 얘기하면서 낙서를 할 때 불쑥 나오는데 이것도 그림이라고 생각해 준 큰 딸이 고맙네요.
오늘은 그 시절을 떠올리면서 볼펜과 컴퓨터용 사인펜 대신 아이패드로 쓱쓱 그려 봤어요.
못 그리는 그림을 용기 내서 시작하고 좌절하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들을 오늘도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2024년 9월 브런치 스토리 작가가 되면서 못났다고 생각했던 제 그림이 프로필 사진이 되고 브런치 연재북의 표지가 되었어요.
앞으로도 제 브런치 연재북의 표지는 제 그림으로 만드는 게 최근 저의 목표가 되었습니다.
그런 쓰임이 되는 것도 제 그림의 탄생 이유가 되지 않을까 하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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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목) 제2화 - <5만 원과 바꾼 첫 그림>이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