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랑 난생처음 같이 그림 그려보기
초등학교 아니.. 국민학교 입학 전 일곱 살 느즈막에 "엄마"가 생겼다.
엄마와 나는 13살 차이.
지금 생각해 보니 우리 큰 딸과 넷째 늦둥이가 12살 차이인걸 보면 엄마도 참 많이 어렸다는 걸 이제야 깨닫는다.
엄마는 스무 살 나이에 어쩌자고 아이 딸린 우리 아빠를 만나서 "엄마"가 되는 무거운 짐을 지었을까?
그깟 첫사랑이 뭐라고... 나의 생물학적 엄마는 첫사랑에 발목 잡혀 군대 간 남자친구를 기다리다 혼자 아이를 낳고, 나의 새엄마는 첫사랑에 목숨 걸어 성년이 되자마자 스스로 "새엄마"라는 이름표를 달았을까?
그런 여자를 두고 아빠는 왜 이렇게 일찍 떠나서 엄마를 50 초반의 "젊은 과부"로 만들었을까?
엄마는 아빠가 떠나고 없는 고향집을 지키며 아빠 무덤이 있는 시골집에 혼자 살고 계신다.
엄마는 나를 혼낸 적이 없다.
여동생, 남동생들이 잘못할 때만 무서운 호랑이 엄마의 모습을 보였다.
내가 혼날 짓을 하지 않고 어린 시절 그림자처럼 조용히 있는 듯 없는 듯 살아서인지 엄마가 나를 딱히 혼내는 일은 없었다. 아니.. 혼내고 싶어도 혼내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의 가슴에 붙어 있는 투명한 "새엄마"라는 이름표가 더 진하게 드러날까 봐.
엄마랑 나는 표면적으로 문제가 없다. 사이도 나쁘지 않다. 엄마가 너무 젊어서 사람들에게 의심을 받는 눈초리만 피한다면 우리는 완벽한 모녀 관계다.
엄마는 국민학교 시절 나의 방학숙제 중에 만들기를 많이 도와줬다. 글을 모르는 그녀는 내가 방학생활을 풀 때는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가도 만들기 숙제가 있으면 온 정성으로 그것들을 완성해 줬다. 색색깔 수수깡을 이용해 오두막 집을 만든다거나 하는 것 말이다.
그녀는 자신만의 설계도가 머리에 있는 것처럼 별다른 시행착오 없이 멋진 집 한 채를 만들어 내 손에 들려 학교에 보냈다. 그것이 그녀가 나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가르침이었고 사랑의 표현이었다.
엄마가 삼 남매의 숙제를 위해 크레파스를 들지 않고 오직 자신만의 그림을 위해 오일파스텔을 손에 쥔 것은 그녀 나이 쉰다섯이 넘어서였다. 한글공부를 해보자고 책상에 앉히면 머리가 아파서 도저히 못하겠다고 연필을 던져놓고 투정 부리던 엄마가 오일파스텔은 손가락에 꼭 쥐고 2시간 동안 꼼짝없이 그림을 그린다.
어린 시절 내 방학 숙제를 도아주던 엄마와 35년의 세월을 순간이동하듯 달려와 우리는 한 책상에 앉아 서로의 세월과 마음이 담긴 그림을 하나씩 완성했다.
우리의 그림은 다른 듯 닮아 있었다.
둘 다 나무와 하늘이 보이는 풍경을 그렸다.
둘 다 해 질 녘과 달밤이라는 저녁의 풍경을 그렸다.
둘 다 그림 속에 사람이 없었다.
엄마의 그림에는 하루 일과가 끝나가는 평온한 노을 진 풍경에 빨간 오두막이 그려져 있었다.
나는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한 커다란 보름달이 가득 찬 하늘을 그렸다.
하지만 빨간 오두막에는 연기가 나지 않는다.
눈부시도록 탐스러운 달빛 아래에는 아무도 없다.
엄마의 빨간 오두막 안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 문득 아빠가 살아계셨더라면 오두막에는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을까? 이런 생각이 떠올라 머리를 흔든다.
우린 그렇게 조금은 평온해 보이고 조금은 쓸쓸해 보이는 그림을 완성했다.
엄마는 본인이 그린 첫 그림이 너무 좋았나 보다.
화실 작가님에게 또 와도 되냐고 묻는다.
"엄마~ 수업 비용은 내가 내는 건데 그걸 왜 화실 작가님한테 허락받아~ 나한테 물어봐야지~~" 나는 어이없다는 듯 엄마를 놀렸다.
"딸~~ 엄마 이거 사주라. 종이랑 크레파스. 시골 내려가서 바닷가 그려 보고 싶어!"
"아~니~ 엄마가 나보다 돈도 더 많으면서 뭘 사달래. 엄마가 날 사줘야지~~"
우리는 여고생들처럼 까르르 거리며 각자의 그림 한 장씩을 들고 화실문을 열었다.
엄마가 좋아해서 다행이다.
나는 모처럼 "딸"이 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