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 예술가를 좌절시킨 과슈 그림
닥치는 대로 그리고 싶었다.
내 손으로 처음 그림을 그리는 맛을 한 두 번 봤더니 집에서도 혼자 그림을 그려 보고 싶었다.
다음 화실 수업시간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손등에 애벌레가 꿈틀거려 기어가듯 그리고 싶은 마음도 그리고 싶은 손가락도 함께 근질근질거렸다.
이 묘한 손끝의 근질거림을 뭐라도 끄적이며 풀어내고 싶었다.
책상 서랍을 뒤적여 굴러다니는 색연필을 꺼냈다. 다이소에서 산 오천 원짜리 색연필이었다.
뚜껑을 열었더니 초보 예술가의 첫 그림에 어울리듯 거칠고 허접한 색연필들이 내 손길을 기다리듯 얌전히 누워있다.
막내가 장난감처럼 몇 번 가지고 놀다가 몇 가지 색은 잃어버려서 마치 이빨 빠진 옥수수처럼 빈자리가 성성했다. 이럴 땐 허접하더라도 개수대로 꽉 찬 색색깔의 색연필이었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도구 탓을 하다니 역시 초보답다.
이왕이면 나의 첫 습작(?)은 A4 용지보다 스케치북에 그리고 싶었다. 하지만 매번 굴러다니던 것 같았던 스케치북은 막상 찾으니 보이지 않았다. 앞에 몇 장 쓰다 버려뒀던 막내의 스케치북이 있을 만도 한데 이상했다. 초보 예술가의 열정을 꺾는 시련이 이런 걸까 싶어 헛웃음이 난다.
그러다 문득 첫째 딸이 손글씨 엽서를 만들 때 썼던 캘리그래피 용지가 생각났다. 초보 예술가에게 딱 적합한 큰 엽서사이즈의 종이였다. 나는 간신히 손에 쥔 작은 엽서에 맞는 간단한 이미지를 찾아봤다.
음.. 귀엽고 만만해 보이는 강아지 그림이 보인다.
나는 그 그림 속 강아지의 포즈를 갈색 색연필로 따라 그려봤다.
뭔가 몽글한 털뭉치 같기도, 뭉쳐 놓은 휴지 같기도 한 강아지 그림이 내 손끝에서 탄생했다.
포즈는 그림 속 남의 강아지고 표정은 우리 집 꼬질이 "모모"였다.
그림을 아이들에게 보여주니 닮았다고, 귀엽다고, 정말 엄마가 그렸냐고 묻는다.
첫 그림은 나름 선방인 것 같다.
어린 시절 미술학원 문턱조차 넘어 본 적 없는 마흔 중반의 나이에 뭔가를 그리겠다는 열망이 피어오르다니... 나조차 종잡을 수 없는 묘한 감정에 나도 모르게 구름 위로 붕 떠버린 열기구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지상에서 떠오른 열기구가 연료를 다 써야 땅으로 내려올 수 있듯.
당분간 나의 손끝과 마음은 허공에라도 붓질을 할 기세였다.
뭔가 그리고 싶다고 근질거리는 손가락도 달랠 겸, 불붙은 열정에 장작 하나 더 던져 넣는 마음으로 혼자서도 따라 그릴 수 있는 미술 실용서를 샀다. 바로 <과슈로 그리는 따뜻한 날들>이라는 컬러링 북이었다.
호기롭게 단색의 소금빵 그림을 패스하고 평소 좋아하는 무화과가 올려진 케이크를 그려 보기로 한다.
책에 그려진 무화과 케이크를 마스킹 테이프가 붙여진 종위 위에서 그대로 따라 그린다.
뭔가 무화과가 누워있는 각도가 애매하게 다르지만 굳이 지우지 않고 물감으로 색을 올리며 변형해 보자는 꼼수를 꿈꾼다.
하지만 물감을 내가 원하는 색으로 만드는 것부터 어렵다.
예시로 나와있는 그림의 색을 보고 엇비슷하게 색칠을 시작했다.
만들어 놓은 물감이 부족해서 방금 쓴 색을 다시 만들려 했지만 똑같은 색은 나오지 않았다.
처음에 칠한 것과 채도가 달랐다.
내가 연필로 그린 테두리 안에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색을 칠하는 과정은 더디고 무료하기까지 했다.
새벽기도 시간에 좌우로 비틀거리며 졸고 있는 어린 동자승의 머리처럼 나의 붓도 그렇게 종이 위에서 꾸벅거리며 그 시간을 버텼다.
무료한 새벽기도.. 아니 색칠이 드디어 끝났다.
멀리서 보면 얼핏 무엇이 샘플이고 무엇이 내 그림이지 모를 정도로 비슷해 보였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도 즐겁거나 재미있지 않았다.
초보 예술가를 꿈꾸던 나는 예술혼을 불태우려 샀던 컬러링 북에서 작은 깨달음을 얻었다.
내가 원하는 그림은 이런 게 아니야.
따라 그리는 거, 똑같이 그리는 거 하나도 재미없어.
나의 무화과 케이크 그림이 컬러링 북의 첫 작품이자 마지막 작품이 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