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데이클래스로 그림 배우기
2021년 11월 30일 마흔넷의 끝자락에서 나는 뒤늦은 생일 선물을 나 스스로에게 했다.
평소 내가 그림에 대한 동경이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여동생이 자기 동네에 위치한 화실에서 원데이클래스 그림 수업이 있으니 해보면 어떻겠냐고 권하길래 못 이기는 척 용기를 낸 참이었다.
낯선 공간, 낯선 사람들을 힘들어하는 내향인인 내가 새로운 도전을 시작할 때는 그 첫발을 떼는 게 몹시 힘들다. 마치 작은 손짓에 놀라 쪼그라드는 문어 같은 나이기에 이런 도전은 꼭 누군가와 함께해야 마음이 놓였다.
그날의 도전을 함께할 대상을 물색하다 혼자 독학으로 애니메이션을 그리는 게 취미인 대학교 1학년 첫째 딸이 떠올랐다. 혼자서 5~6시간 동안 그림을 그릴정도로 관심이 있으니 1인 5만 원이라는 원데이클래스 수업비용이 덜 아까울 것 같다는 계산이었다.
두근거림과 설렘, 그림을 못 그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을 동시에 가슴에 담은 채 화실 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작은 공간을 꽉 채우다시피 한 커다란 테이블이 있고 그 위에 100여 가지 색깔의 오일파스텔이 있었다.
오일파스텔은 쉽게 말해 크레파스 같은 질감으로 종이에 색을 칠하고 손가락으로 문지르고 면봉이나 휴지로 색을 혼합하는 등 다양한 형식으로 초보자도 쉽게 사용할 수 있는 미술재료다.
나와 큰 딸은 바다풍경을 그리기로 했다. 휴대폰 사진 속의 바다 풍경을 그리는데 파도의 포말과 하늘의 구름 표현이 특히 어려웠다. 너무 인위적인 느낌의 오일파스텔 터치감이 눈에 거슬리고 왜 지평선에 피어오르는 구름은 좌우대칭처럼 그려서 데칼코마니 찍은 듯 그렸을까. 아직도 이 그림을 보면 하트 밑부분이 잘린 것 같이 그려진 뭉게구름이 계속 눈에 거슬린다.
큰 딸은 화실 작가님에게도 도움을 받지 않고 혼자만의 바다에 빠졌다.
하지난 나는 2시간 동안 낑낑거리며 작가님 도움으로 그림 한 장을 겨우 완성했다. 어찌어찌 완성은 했는데 내 어설픈 그림에 슬쩍 기분도 나빠졌다가 첫 그림인데 이 정도면 괜찮지 않나?라는 묘한 자신감도 몇 초정도 차올랐다가 금세 큰 딸의 그림을 슬쩍 보고 역시 나는 재능이 없나 봐.. 이런 생각으로 지하 천 미터까지 자신감이 곤두박질도 쳤었다.
괜히 그림 잘 그리는 큰 딸이랑 같이 와서 나의 재능 없음을 내 돈 주고 깨달은 느낌이랄까?
뭔가 나 스스로 살짝 주눅 들기도 하고 미술학원 다닌 적 없는 큰 딸이 혼자서 쓱쓱 그려내는 게 부럽고 대견하기도 한 양가감정으로 인해 혼란스러웠던 것 같다.
나는 첫 그림 그리기에 도전 후 엄청 실망했다.
그래서 결국 그림 배우기를 포기하기로 했을까?
아니다.
내가 그림을 그리기 위해 어떤 선택을 했을까? 바로 나보다 그림을 더 모르는 한 사람.
그 사람과 함께 그림을 그려보자. 서로 그림에 대해 모르니까 덜 비교하고 덜 창피할 것 같은 마음이었다.
그 사람은 바로 "엄마"였다.
어린 시절 학교 근처에도 못 가 봐서 그림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나의 "엄마"
내 나이 일곱 살에 불쑥 나타나 "엄마"가 되어 준 지금의 엄마와 함께 그림을 그려보면 어떨까 생각한 것이다.
글씨를 모르는 그녀도 연필이 아닌 오일파스텔을 손에 쥐면 자신의 마음을 도화지에 써 내려갈 수 있지 않을까? 그녀도 나처럼 뭔가 마음속에 있는걸 오랜 시간 동안 표현해보고 싶지 않았을까?
시골에 있는 엄마는 병원진료 때문에 12월에 동생집에 방문한다.
용기가 없어 아직 엄마에게 같이 그림 그리러 갈 수 있는지 묻지도 못했다. 묻지 못했으니 돌아올 리 없는 답인 줄 알면서도 엄마가 서울로 올라오는 날을 기다리며 혼자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이렇게 엄마랑 단둘이 뭘 배워보자고 말하는 건 처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