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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기환 Oct 31. 2024

푸른 내음과 해안 절경을 품은 동해안 길 4

(‘24. 4. 27 ~ 4. 28)

지난겨울은 유난히도 길었다. 어둡고 차갑던 긴 침묵을 깨고, 이제 봄이 한창이다. 봄의 전령 개나리, 진달래, 벚꽃이 피고 지더니, 연녹색 나뭇잎들이 점점 짙어가고 있다. 봄을 이겨내는 겨울은 없다.


올해 첫 출발하는 국토종주길. 떠나는 여행은 언제나 설렘이다. 지난해 다하지 못한 동해안길 나머지 구간(통일전망대 ~ 경포해변 )을 마무리하기 위해 이른 아침 열이 형, 아우와 셋이 동서울버스터미널에 모였다. 작년 10월 말, 새재길과 오천길을 끝으로 국토종주 라이딩은 잠시 쉬어갈 수밖에 없었다. 각자 일정이 안 맞기도 했지만, 겨울이 깊어가면서 안전을 위해 잠시 멈춰야 했다. 그래도 날이 따스해지기라도 하면, 몸이 근질근질한 우리는 가까운 한강, 소요산, 양평 등지를 시간 나는 대로 돌며 봄을 기다렸. 


이번 라이딩에는 이 구간을 이미 완주한 춘이 아우와, 개인적인 사정이 있는 만·세 아우도 함께 하지 못한다. 국토종주 라이딩은 언제나 네 명 이상이었는데, 셋이서 출발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왠지 허전하다.


먼 먼 기억, 추억.....


동서울터미널을 출발한 버스가 강원도 북쪽 끝자락, 대진을 향한다. 버스가 서울을 벗어나 달리더니 강원도 홍천 버스터미널에 잠시 정차한다. 이곳에서 조금 더 가면 인제, 원통이 나온다. 갑자기 가슴이 뛴다. 


아주 오래전, 나는 원통에서 군 생활을 했다. 그것도 민간인을 전혀 볼 수 없는 민통선 깊은 산중이었다. 낮에는 첩첩으로 둘러싸인 산과 뻥 뚫린 하늘을 벗 삼았고, 밤에는 외로운 산짐승 울음소리를 들으며, 푸르던 젊은 시절을 몸부림으로 3년 가까이 보냈다. 40 년을 훌쩍 뛰어넘은 아득한 기억 저편의 다.


원통 터미널에 버스가 다시 정차한다. 나는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 반사적으로 일어나 잠시 버스에서 내렸다. 주변을 둘러보니, 그리 높은 건물이 들어서지도 않아 거리의 풍경은 옛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면서도, 낯선 상호들이 즐비하다. 같은 듯 다른 거리 풍경이다.  터미널 앞에 자리 잡고 있던 여러 개의 다방들거의 사라지고, 이름을 바꾼 커피숍 하나가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터미널 뒤편으로 이어지는 좁은 시장 골목은 옛 모습 그대로다. 그 시절, 원통에 잠시 외출이라도 나올  때면, 시장 뒷골목 선술집에서 막걸리 한 사발 들이키고, 다방으로 몰려가 차 한 잔으로 마무리하는 것이 군인들의 작은 낙이었다.


휴가를 나온 듯 한 군인 몇이 거리를 서성이고 있다.  어깨에 붙어있는 완장이 내가 근무했던 부대의 표식이다. 그들의 모습에서 먼 옛날 내 모습이 오버랩된다.  


"훗날, 그들은 어떤 의미로 이곳을 기억할까?"


말이라도 한 번 붙여보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출발하는 버스에 서둘러 올랐다.

원통 터미널과 읍내 거리

버스는 백담사 입구를 지나 진부령길로 들어선다. 요즘은 동해로 가는 고속도로가 많이 뚫려 진부령 길은 차량 통행이 뜸한 추억의 길이 되었다. 이 길은 동해안으로 포격 훈련을 위해 자주 오가던 길이다. 푸른 군복을 입고 군용 트럭 뒤에서 목청 높여 군가를 부르던 20대 초반의 청년이 귀밑머리 희끗한 초로의 나이가 되어 추억처럼 이 길을 달리고 있다. 제대하던 날, “원통 쪽을 보고 오줌도 안 눈다”고 했던 내가 이 길을 지나면서  한 번 울컥한다. 나이를 먹으니 기억은 흐릿하고, 추억은 진하다. 문득, 인제, 원통에서 군 생활을 남자라면 수없이 되뇌었을 말이 추억처럼 스친다.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네! “


동해의 최북단 통일전망대


12시가 다되어 종착점인 대진 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배는 고프지만, 일단 통일전망대 인증을 마치고 식사를 하기로 했다. 터미널에서 약 5km 정도를 거슬러 올라가니 민통선 출입신고소가 나온다. 통일전망대 인증센터는 출입신고소 입구에 있어 별도 출입신고를 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여기서 멈춰야 한다는 것이 못내 아쉽다.


"우리 생애에 저 민통선을 뚫고, 휴전선 넘어 평양과 원산까지 달릴 수 있는 날이 올까?"


그 소망을 담아 인증샷 한 장씩 남겼다.

소망을 담은 통일전망대 인증센터


해수욕장 맛 길


오던 길을 되돌아 대진항으로 갔다. 회덮밥과 물회를 시켰다. 배고프고 목마른 우리들에게는 환상의 조합이다. 국물까지 시원하게 싹 비우고 나니, 없던 근심까지 다 사라진다.


본격적인 라이딩을 시작한다. 명파해변을 시작으로 쪽빛 하늘과 바다를 끼고 달린다. 화진포에 도착하니 김일성 별장과 이기붕 별장, 이승만 대통령 별장 가는 길 표지판이 연달아 나오면서 이곳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가를 대변해 주고 있다.


동해안 길 강원구간은 해수욕장이 연이어 나타난다. 화진포를 시작으로 송지호, 봉수대, 삼포, 교암리, 아야진, 정암, 설악, 낙산, 하조대, 경포, 맹방, 망상 해수욕장 등이 끝없이 이어진다. 그야말로 해수욕장 맛 길이다. 동해안은 나 지금이나 여름 피서지로서는 가장 핫한 곳이다. 지금은 고속도로가 여러 개 뚫려 동해안 접근이 엄청 편해졌지만, 그 옛날에는 동해안 해수욕장 한번 오려면 큰마음먹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제는 자전거로도 이 길을 달릴 있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끝없이 이어지는 바닷길은 같은 듯 다른 풍광을 그려내고 있다. 부서지는 파도와 해안선, 항구와 방파제, 모래사장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달린다. 때론 행복에 겨워 소리를 질러대고,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때론 가슴으로 스며드는 행복을 안고 조용히 달린다.


동해안의 해수욕장


거문고와 영금정(靈琴亭)


영금정에 도착했다. 바다와 바위를 벗 삼아 우뚝 서서 색다른 멋을 만들어내고 있는 영금정. 파도가 바위에 부딪치며 내는 소리가 신령한 ‘거문고’ 소리와 같다고 하여 영금정(靈琴亭)이라 이름하였다 한다. 정자의 이름 하나까지 자연을 노래하던 선인들의 낭만이 스며있다.  


잠시 정자에 앉아 동해바다가 만드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본다. 먼바다의 소식을 안고 달려온 파도가 바위에 부딪친다. 잔잔하게 부서지는 파도, 뺨을 스치는 짭조름한 바람, 햇살과 바다가 손 잡고 만들어내는 윤슬......

모든 게 완벽한 신의 작품이다. 다만,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거문고가 아쉽다.


영금정

속초의 인연


오늘은 속초에서 라이딩을 마무리하기로 하고, 미리 예약해 둔 회센터로 향했다. 속초 바다의 싱싱한 회가 우리의 마음을 급하게 한다. 특히, 오늘의 만찬에 초대된 뜻밖의 사람들이 있다 하니 더욱 그랬다. 청이 아우가 작년 제주도 라이딩 때 우연히 만났던 인연이라 다.


주문한 회가 맛깔스럽게 담긴 접시가 테이블 위에 오르고, 막걸리와 소주가 두어 바퀴 돌 때쯤 우리가 기다리는 인연이 도착했다. 모녀 사이라는 그녀들을 보며 깜짝 놀랐다. 나와 동갑내기인 엄마가 너무 젊어 보여 마치 자매인 듯 보였다. 그들 모녀는 오랜 기간 함께 라이딩을 하고, 각종 포츠도 함께 즐긴다고 한다. 멋지고 건강하게 사는 두 모녀의 모습에서, 넘치는 딸의 애교를 넉넉하게 받아주는 엄마모습에서, 가슴 가득한 행복을 본다.


뜻밖에 좋은 인연의 출현으로 한껏 분위기는 고조되고, 낯선 땅 속초의 밤이 행복하게 익어갔다.

초면이지만 스스럼없이 두어 시간을 함께 해준 모녀에게 고마운 마음을 이 글에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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