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일기의 시작점, 애하
페달을 밟는다. 호산장성을 벗어나니 강이 다시 나타난다. 당연히 압록강인 줄 알았는데 압록강 지류인 '애하'라 한다. 애하는 호산을 끼고 중국땅을 흐르는 강으로,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첫머리 '도강록'편에 나오는 강이다.
박지원은 청나라 황제인 건륭제의 칠순 잔치를 기념하기 위한 외교 사절단과 함께 청나라에 방문하게 된다. 그는 직무 수행에서 자유로운 비공식 수행원의 자격으로 청나라를 방문하였기 때문에 청나라의 문물을 더욱 깊이 있게 관찰할 수 있었다. 당시 연경(북경) 가는 일행은 한양을 출발, 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너는데 장마로 인해 우적도(압록강의 북한령 섬)를 청나라 땅인 줄 알고 잘못 내렸다. 갈대숲을 헤치며 십리 길을 걸어 어렵사리 애하에 이른다. 다시배를 타고 애하를 따라 청나라땅을 밟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네이버 위키백과 참조)
연암은 이 강의 폭이 임진강과 비슷하다고 열하일기에 적고 있다. 내가 보기에도 압록강에 비해서 강폭이 훨씬 좁다. 연암의 표현대로 임진강 정도의 강으로 보인다.
애하를 건너는 다리 아래 정박해 있는 나룻배 두어 척이 강물에 흔들리고 있다. 250여 년 전, 이 강을 따라 연경으로 가던 박지원 일행이 탄 배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장마철 빗속을 헤매이다 가까스로 배를 잡은 일행의 환호와 왁자한 웃음소리, 뱃사공의 노래가 질펀하게 넘치진 않았을까? 무심한 강물과 함께 흘러간 그날을 상상해 본다. 역사는 흐르고 강은 말이 없다.
복숭아 익어가는 마을
다시 길은 압록강을 따라간다. 나지막한 산과 들판에는 온통 복숭아 과수원이 끝없이 이어진다. 이 지방은 복숭아가 특산물이란다. 나는 퇴직 후 농작물 손해평가사 자격을 취득하여 몇 년째 활동하고 있다. 올해도 이곳에 오기 전에 충북 괴산 과수원에서 여러 날 복숭아 피해조사를 했다. 먼 이국 땅에서 복숭아를 보니 반갑고 호기심이 발동한다.
강을 따라 끝없이 이어지는 과수원에는 붉은 봉지가 씌워진 복숭아들이 나뭇가지가 부러지도록 달려있다. 복숭아는 병충해 방지는 물론, 색상과 탄력을 유지하고 흠집이 나는 것을 막기 위해 적과(摘果) 후에는 반드시 봉지로 싸준다. 우리나라는 대부분 노란색 봉지를 쓰는데, 중국인의 붉은색 사랑은 복숭아 봉지에서도 여지없이 보인다. 언뜻언뜻 스치는 마을의 지붕도 붉은색 일색인데, 복숭아 봉지조차 온통 붉은색이다.
길을 달리다 보니 이따금씩 과수원 앞에 가판대를 펼치고 복숭아를 팔고 있다. 황도, 백도도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납작복숭아가 많이 보인다. 마치 기형 복숭아처럼 보기에는 볼품이 없는데, 간식으로 먹어보니 아삭한 맛이 그만이다. 모두들 처음 먹어보는 납작복숭아에 반한 듯하다.
농작물은 농부의 땀방울과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자란다 했다. 농부의 정성으로 익어가는 복숭아 과수원에 애정의 눈길을 던지며 달린다.
전기자전거의 유혹
강을 따라가는 길은 업다운이 심하지 않다. 그러나 강을 버리고 잠시 산길로 들어서면 오르막이 만만치 않게 다가온다. 뜨거운 햇살이 등짝을 때리며 부서진다. 차츰 선두와 거리가 벌어지기 시작한다. 저 멀리 산등성이를 넘어가고 있는 선두그룹이 부럽다. 얼추 출발한 지 30여 km를 달렸나 보다. 잠시 공원에서 휴식을 취하는데, 힘들어하는 나에게 대구에서 온 라이더가 "내 자전거와 바꿔 타 볼래요?" 한다. 그는 일본 시모노세키 라이딩 때도 함께 해서 두 번째 만남이라 이젠 편한 사이가 되었다. 익숙하지 않은 자전거를 타는 것이 어색해서 망설였지만, 그의 배려가 고맙고 솔깃했다. 자전거를 바꿔서 천천히 달리니 차츰 익숙해진다. 부드럽게 달리던 자전거가 가속이 붙으니 시속 50km를 넘어선다. 그 이상도 달릴 수 있다는데 조금은 겁이 난다. 내 자전거는 열심히 밟아야 시속 30km를 넘기 힘든데, 부드러우면서도 속도감까지 맛볼 수 있다. 스치는 바람이 행복으로 스며든다. 늘 후미에서 달리던 내가 선두 그룹에 끼어 달린다. 오르막이 시작되어 가속기어를 넣는다. 오르막이 평지만큼 편하다. 뒤를 돌아보니 내 자전거를 몰고 오는 대구 라이더가 저만치 뒤에서 힘겨운 페달링을 하는 것이 보인다. 내가 저러했을 것이다. 전기자전거의 행복이 더욱 크게 다가온다.
사실 내 자전거는 다른 자전거에 비해 가격이 저렴하고, 무게도 많이 나갈 뿐 아니라, 페달링을 도와주는 클릿 장치 조차도 없다. 그 자전거를 끌고 악으로, 깡으로 버티며 국토종주를 마무리했다. 클릿은 페달링을 도와주기 때문에 대부분 라이더들이 선호하지만, 적응하지 못하면 자칫 넘어지고 다치기 쉽기 때문에 여태 망설였다. 이번 백두산 라이딩을 준비하면서 클릿을 장착하거나 전기 보조 배터리 설치를 고민 고민하다가 그냥 왔다. 오늘처럼 업다운이 반복되는 산길은 특히 힘이 부친다.
자전거는 힘이 닿을 때까지 함께 하고픈 내 좋은 친구다. 내 좋은 친구와 오랫동안 함께하려면, 언젠가는 전기자전거로 바꿔 타야하는 타협의 날이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