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백두산 자락길을 달리다

by 윤기환


여행 셋째 날,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통화시 도심거리에는 불빛 몇 개가 깜빡깜빡 졸고 있다. 밤새 비가 내렸는지 도로가 촉촉이 젖어있다. 창을 여니 제법 서늘한 공기가 훅 스민다. 동쪽 하늘이 조금씩 훤해지면서 서서히 도시가 미몽에서 깨어나고 있다.


호텔 식당에서 이른 아침식사를 마치고, 백두산 아랫마을 이도백하를 향해 버스가 출발한다. 어젯밤 잠을 설쳐 눈을 감고 잠을 청해도 잠이 오지 않는다. 여행이 주는 설렘이 신체 리듬을 바꾸고 있나 보다. 차창으로 스치는 산과 들, 마을에 눈을 맞추며 말없는 대화를 나눈다.


이도백하, 백산수


4 시간여를 달려 버스는 이도백하에 도착했다. 잔뜩 찌푸렸던 하늘이 다시 청명하다. 작고 소박한 도심으로 들어서니 가로변에 아름드리 소나무가 멋지게 뻗어있다. 자라면서 껍질을 벗어 여성의 피부처럼 고와진다는 나무, 미인송이다. 탐스럽게 뻗은 나무들이 도시의 품격을 더한다.


이도백하는 백두산 북쪽 기슭에 위치한 작은 마을로, 중국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안에 속해 있다.. 조선족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어서, 낯익은 한글 간판을 쉽게 볼 수 있고 한식당도 많이 보인다. 우리는 '강원도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이곳이 백두산이 아니라 설악산 어디쯤 인듯하다. 비빔밥, 된장국, 돼지고기, 상추, 호박잎, 가지찜, 콩나물 무침 등 푸짐한 우리 밥상으로 배를 든든히 채웠다.


이도백하에는 우리나라 굴지 기업인 농×에서 설립한 백산수 공장이 있다. 백두산 지하 암반으로 스며든 물이 50여 km를 지나 하루에 2만 톤 남짓 용출하는데, 이 물을 끌어들여 인근의 정수 공장에서 여과하여 만든다고 한다. 이곳까지 진출한 기업 덕분에 우리는 맘만 먹으면 국내에서 백두산 암반수를 마실 수 있다. 고마운 일이다.

이도백하 거리와 미인송


자작나무와 오지마을


이도백하에서 버스로 40여분 이동해서 오늘의 라이딩을 시작한다. 우리가 달리는 길은 평균 700~800m 고지를 지난다. 공도와 임도를 번갈아 달리는 길은 울창한 숲길이다. 도로명이 따로 있겠지만, 나는 이 길을 '백두산 자락길'이라 불러본다. 그리 부르며 달리니, 왠지 중국땅이 아니라 내 나라 땅 같아 편하고 좋다


도로 양쪽 숲에는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자작나무가 빼곡하다. 백두산처럼 낮에는 해가 강렬하고 밤에는 기온이 뚝 떨어져 일교차가 큰 지역에서는 나무들이 자라기 어렵다. 그러나 자작나무는 하얀 껍질이 햇빛을 반사시켜 줄기의 온도를 서늘하게 유지해 주기 때문에 고산에서 군락을 이루며 살 수 있다. 이곳 사람들은 백두산 자작나무에는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다 한다. 고산지대의 척박한 환경을 견뎌내며 하늘을 향해 곧고 높이 뻗은 나무의 생명력이 그렇게 믿게 했을 법하다. 게다가 잘 썩지 않아 죽은 자를 저승길로 안내하는 관을 만드는데 많이 쓰인다 하니, 더욱 그럴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영혼이 깃든 자작나무


길은 작은 마을을 관통하며 지난다.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시장거리도 있다. 생선을 손질하는 가게, 잡화상과 음식점, 선술집도 보인다. 웃통을 벗어젖히고 왁자한 웃음과 함께 대낮부터 술을 마시는 사람들, 하교하는 아이들의 종종걸음도 보인다. 모처럼 사람 사는 거리를 본다. 이처럼 백두산 깊은 산자락 오지에도 사람들은 살고 있다. 그들만의 행복한 삶의 현장을 잠시 엿보며 마을을 지난다.


아우의 잔소리


만만치 않은 오르내리막길이 서서히 지치게 한다. 특히, 착시를 불러일으키는 길이 많다. 분명 오르막인데도 내리막처럼 보이는 길이 자주 나타난다. 심리적으로 피로를 부르기 딱 알맞은 길이다. 늘 그랬듯이 나는 선두와는 거리가 멀다. 최선을 다해 페달을 밟지만, 선두 그룹에 끼질 못한다. 그냥 후미는 내 자리라고 생각하는 게 편하다.


단체 라이딩을 할 때는, 선두를 리드하는 라이더 한 명과 후미를 지키는 라이더 한 명을 지정해서 달린다. 그래야 이탈을 막고, 안전한 라이딩을 할 수 있다. 후미를 달리며 뒤를 돌아보니 내 뒤로는 우리를 태우고 달리던 버스가 천천히 따라오고 있다. 후미를 담당하고 있는 아우가 나와 보조를 맞추며 동행해 준다. 든든한 우군이다. 그런데 때로는 잔소리꾼이다. 내가 힘에 겨워 기어를 낮추면, 뒤쫓아오던 아우는

"형님!! 기어를 높이세요!. 힘만 들어요" 하며 연신 잔소리를 해댄다. 기어변속은 라이딩에서 가장 중요하다. 나는 국토종주를 하며 나름 체득한 기어변속을 하며 죽을힘을 다해 달리고 있는데, 아우의 잔소리는 계속된다. 국토대종주 때도 그랬듯이, 아우의 잔소리는 정이고 사랑임을 믿는다. 그 힘으로 달린다. 그러면서도 한마디 내뱉는다.

"아우야! 너도 나이 먹어봐라!"

한바탕 웃으며 나란히 달린다.


후미는 우리가 지킨다


빵빵대


업다운이 계속되는 길. 자동차들이 씽씽 달리는 길은 때론 위협을 느낀다. 특히, 트럭이 빵빵대며 빠르게 스쳐갈 때면 오싹한 기운까지 든다. 중국에서는 소위, 3개 대학을 모두 졸업해야 비로소 베스트 드라이버가 될 수 있다는 우수갯소리가 있다. '빵빵대, 들이대, 돌려대'가 그것이다. 특히 도심으로 들어가면 이를 더욱 실감하게 된다. 오늘은 비교적 한적한 길임에도, 그들은 베스트 드라이버의 면모를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다. 빵빵대며 들이대는 차들이 연신 스쳐가는 길을 조심 달린다.


수박파티


지치고 목이 타들어갈 때쯤, 잠시 휴식을 취하는데 큼직한 수박이 등장한다. 목마를 때 수박만큼 좋은 과일이 어디 있겠는가! 모두들 한두 조각씩 먹고도 남을 만큼 큰 수박이 지친 몸들을 붉은 행복으로 충전시켜 준다. 여행사 대표의 세심한 배려가 고맙다.

수박파티


오늘의 라이딩은 70km로 마무리했다. 비록 중국땅에서 달리긴 했지만. 우리 민족의 혼이 담긴 영산, 백두산 자락을 달릴 수 있었다는 건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이다. 언제 다시 이런 행복을 맛볼 수 있겠는가. 함께 한 동료 라이더 모두 한마음이었으리라.


오늘은 백두산 서쪽 첫 동네, 송강하에서 묵는다. 버스는 송화강을 따라 달린다. 옥수수밭 너머로 해가 설핏 숨는다. 반짝이는 햇살이 옥수수밭에 부서진다. 한가로운 행복이 가슴으로 스민다.

keyword
이전 05화가도 가도 끝이 없는 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