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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의 얼굴, 천지

by 윤기환


대망의 천지 라이딩을 앞두고 간밤에는 술도 자제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어릴 적 소풍 전날처럼 좀처럼 깊은 잠에 들지 못했다. 자정을 갓 넘긴 시각, 알람이 요란하게 울린다. 졸린 몸을 샤워로 깨우고 짐을 챙겨 라운지로 내려가니, 부스스한 얼굴들이 웃으며 맞아준다.


천지 가는 길


새벽 1시 30분. 뿌연 달무리가 서녘으로 기울고, 별빛 하나 없는 하늘이 온 세상을 까맣게 덮고 있다. 오늘 우리는 남파를 통해 천지에 오른다. 백두산은 일반 관광객에게 아침 8시부터 입산을 허락하지만, 자전거 라이더는 그 이전에 하산을 마쳐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꼭두새벽부터 분주할 수밖에 없다.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버스가 달린다. 남파 입구까지는 두 시간이 걸린다. 연신 하품이 나오지만 잠은 오지 않는다. 고도가 높아지는지 귀가 먹먹해진다. 눈을 감으니 설레는 마음이 더 크게 일렁인다.


남파 초소에 도착했다. 해발 1,350m, 정상까지는 35km 거리. 이곳에서부터는 중국 공안이 제공하는 차량을 타야 한다. 남파 3문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두 대의 셔틀버스에 나눠 타니 기대와 걱정이 함께 밀려온다. "부딪혀 보는거야!" 맘 속으로 다짐한다.


구불구불 오르막길, 자동차는 엉덩이를 흔들며 잘도 치고 올라간다. 길 옆에는 중국과 북한을 가르는 철책이 이어진다. 어둠이 서서히 걷히며 숲의 나무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하얀 야생화가 눈송이처럼 피어 있고, 울창한 숲 사이로 백두의 윤곽이 조금씩 드러난다. 백두산을 오르는 4개의 관문 중 유일하게 남문은 북한 땅을 밟을 수 있다. 그래서 남파로 오르는 길은 경비가 삼엄하다. 뒤를 돌아보니 공안차가 붉은 불빛을 깜박이며 뒤따른다. 북한 땅에 들어섰다는 사실이 묘하게 가슴을 설레게 한다.

백두산 라이딩 출발선에 서서


누워버린 나의 애마


천지 라이딩은 15km로 예정했는데, 오늘은 짙은 안개와 고르지 못한 날씨 탓에 8km 지점에서 출발하기로 했다. 길은 안개의 바다에 파묻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백두산 새벽 라이딩의 진수라 불리는 장엄한 일출도 안개가 삼켜버렸다. 못내 아쉽지만, 바람이 휘몰아치며 잠시 드러냈다 이내 사라지는 백두의 얼굴만으로도 감격스럽다.


열일곱 라이더들이 일렬로 서서 천지를 향한 첫 바퀴를 굴린다. 평지였던 길이 용틀임하 듯 휘어지더니, 이내 하늘을 찌를 듯이 오르막으로 치닫는다. 그 뒤로는 단 한 번도 내리막을 허락하지 않는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맥박은 심하게 요동치며 가슴을 쿵쿵 울린다. 버스조차 휘청이며 올라야 하는 이 길을 자전거로 오른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도전인지 실감한다.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애마 ‘행복이’도 더는 버티지 못하고 길바닥에 드러누워 버렸다. 나를 태우고 오른 그 고단함을 생각하니 애처롭기도, 귀엽기도 하다. 벌러덩 누워 있는 모습이 정겹고 웃음이 나와, 우정의 사진 한 장 남겼다.

열일곱 라이더들의 분투와 누워버린 나의 애마


풀이 눕는다


물 한 모금 마시고 서서, 백두의 정기를 깊이 들이마신다. 안개 사이로 언뜻 드러나는 웅대한 봉우리들이 나를 압도한다. 도로 옆에는 바람에 눕듯 납작 엎드린 작은 나무들, 이름 모를 들풀과 풀꽃들이 지천으로 깔렸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김수영의 풀, 중략)


시인 김수영은 시 '풀'을 통해 외압에 굴하지 않고 살아가는 민중의 강한 생명력을 노래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저 풀꽃과 들풀들도 눈비와 거친 바람을 견디며 강인한 생명을 키워내고 있다. 그 모습이 숭고하고 아름답다.

강한 생명력을 키우고 있는 둘풀, 들꽃


심연의 바다


다시 행복이를 일으켜 세우고 길을 잇는다. 도로 표지판은 이곳이 해발 2,140m라고 알려주고 있다. 바람 불고 안개 자욱한 백두산 북녘 땅, 아무도 없는 길을 달린다. 안개에 잠긴 길은 마치 심연의 바다 같다. 숱한 이들이 차로 올랐을 길을, 나는 두 바퀴에 몸을 싣고 오르고 있다.


안개에 묻힌 길이 조금씩 열린다. 끌고, 타고 가기를 반복하며 오르는데 앞선 동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이 길 끝에 천지가 있으리라 믿으며 나의 길을 간다. 깊은 산중의 하얀 바닷속에서, 어디서도 맛볼 수 없는 고요와 삶의 여백을 만난다.

안개에 갇힌 백두

정상까지 3km 남짓 남았을 무렵, 앞서 간 동료들의 모습이 하나둘 보인다. 몇은 마지막 힘을 짜내 페달을 밟고, 몇은 체념한 듯 자전거를 끌고 간다. 뒤따라온 차가 멈춰 서고, 가파른 오르막 앞에서 마음을 접는다. 변명 같지만 시간도 촉박하다. 이대로 자전거를 끌고 간다면 정상까지 족히 1 시간은 걸릴 것이다. 일곱 명이 차에 몸을 싣고 정상에 오르니, 이미 도착한 동료들이 환한 얼굴로 맞는다. 열일곱 중 열 명은 완주에 성공했다. 특히 칠순을 넘긴 열이 형의 완주는 우리 모두의 자존심을 지켜주었다.


천의 얼굴, 침묵의 얼굴 - 천지


백두산과 천지는 1962년 '조중변계조약'으로 갈라졌다. 16개 봉우리 중 북한이 7개, 중국이 9개를 관리하며, 천지의 절반은 북한, 나머지는 중국 땅이란다. 아프지만 이것이 현실이다.


해발 2,257 m 천지 정상에 서니 여전히 운무가 짙게 깔려 있다. 가까운 사람조차 희미하게 보일 뿐이다. 천지 표지석 앞에서 기념사진을 남기고, 가이드가 건네준 북한 술 들쭉주 한 모금 마신다. 쌉싸래한 기운이 목을 타고 내려가며 온몸을 달군다. 안개비가 세차게 얼굴을 때리고 한기가 오싹 온몸을 휘감는다. 그 속에서 평균 나이 육십을 훨씬 넘긴 동료들이 아이처럼 천진하게 웃고 떠들고 있다.


천지는 끝내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 삼삼오오 사진을 찍고, 간식을 먹으며 한 시간 가까이 기다렸지만, 발아래는 여전히 하얀 안개의 바다뿐이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기다리며 생각한다. 천지는 천 개의 얼굴을 가졌으니, 오늘 우리가 만난 것은 천지의 또 다른 ‘침묵의 얼굴’ 이라고. 백 번을 와도 두 번 보기도 어렵다는 천지. 나는 이미 십여 년 전 그 장엄한 얼굴을 본 적 있으니, 오늘은 그 기억으로 위안을 삼는다.

천지의 천진한 얼굴들


월북과 탈북?


아쉬움을 안은 채 하산하는 버스에 오른다. 백두산은 하산 라이딩을 허락하지 않는다. 가파른 경사 탓에 사고가 잦아, 몇 해 전부터 금지되었다 한다. 셔틀버스 창밖으로 안개비가 내리고, 키 작은 나무들이 점점 키 큰 숲으로 변한다. 자작나무 숲이 펼쳐지는 순간, 핸드폰 시간이 한 시간 빨라진다. 북한에서 중국으로 넘어온 것이다.


짧은 시간이지만, 우리는 북한 땅을 밟았다가 다시 돌아왔다. 서너 시간 만에 월북과 탈북을 한 셈이다. 내 나라 땅을 밟았다는 짜릿한 기쁨과 동시에 밀려드는 슬픔이 공존한다. 과연 우리 생애에 자유롭게 그 땅을 밟을 날이 올까? 압록강을 달릴 때부터 마음속에서 되풀이되는 질문을 또 다시 던진다.


남문으로 돌아온 버스가 우리 일행에게 내리라고 재촉한다. 무심한 하늘은 보슬비를 촉촉이 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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