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그치는가 싶더니 몇몇 지역이 집중호우로 농작물 피해가 많았다. 청양도 그중 한 곳이다. 일주일 전에 다녀간 청양 땅에 집중호우로 인한 고추 피해조사를 위해 다시 내려왔다. 호우로 쓸려 내려간 고추밭은 농부의 일그러진 얼굴을 많이 닮아 있다. 대부분의 밭작물이 그러하듯이, 고추도 침수가 되면 곧 고사로 이어지고, 병에 취약한 작물의 특성상 각종 병들이 창궐한다.
쓰러지고, 떨어지고, 썩고, 무른 고추밭을 보는 농부의 한숨이 깊어간다.
"다 떨어졌슈! 쓸 만한 것 하나도 없슈....."
농부의 탄식 섞인 사투리가 가슴을 때린다.
이른 봄부터 온 힘을 다해 고추밭에 정성을 들였건만, 인간이 하늘의 뜻을 어찌 알겠는가!
결국 '마지막 농사는 하늘이 짓는다'는 옛말을 되뇌며 하늘을 본다.
저만치 씨꺼먼 구름이 또다시 몰려오고, 여전히 가는 비가 얼굴을 적신다.
비가 그치고, 이글거리는 태양이 다시 붉게 익어가는 고추밭을 감싸고 있다.
여름 한 낮, 조는 듯 한가로운 고추밭에 내가 서 있다. 우주의 모든 생명들은 각자의 삶을 위해 무한 투쟁을 하고 있다. 모든 중심에 인간이 있다. 그 무한 경쟁 속에서 인간들은 잔인할 정도로 자신들에게 직접 관계가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그러나 고추의 입장에서 바라본 세상은 다르다.
병에 취약한 고추가 장마 뒤 살인적인 무더위를 억척스레 버티고 있다. 뿌리를 파고드는 잡초와 자리다툼을 하고, 해충이 끊임없이 괴롭혀도 잘도 버텨냈다. 그러나 끝내 싸움에서 스러진 고추들이 서서히 타들어가고, 짓무르고, 구멍이 뚫린 채 말라비틀어져 가고 있다.
가엾이 사라져 가는 생명, 아직은 간신히 버티고 있는 생명. 그리고 붉게 살아남은 생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