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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 두 마지기

by 윤기환 Feb 24. 2024

들녘엔 여전히 나락의 물결이 살랑대고 있다. 군데군데 이미 추수를 마친 논들이 늘어가고 있다.

눈을 들어 시선 끝닿는 곳을 바라본다. 하늘과 맞닿은 곳에 지평선이 길게 그어져 있다. 청명한 하늘이 누런 들판을 포근히 감싸고 대지의 숨결을 가만히 듣고 있다.


내 고향은 이곳에서 멀지 않은 삼례다. 더 정확히는, 삼례에서 만경강 한내 다리를 건너면 둑아래 자리한 서른 가호 남짓한 자그마한 동네다. 마을엔 그다지 큰 부농도 없었고, 마을 어르신들은 그럭저럭 논과 밭을 일구며 가난을 숙명처럼 짊어지고 살았다. 그 당시는 대부분이 그렇게 살았다지만, 우리 집은 그중 좀 더 가난한 농가였다. 논 두 마지기에 밭뙈기 한 두락이 전부였으니까....


두 마지기 논에서 나온 쌀은 나락으로 예닐곱 가마 정도였다. 그래도 추수한 나락을 윗방 구석에 쌓아놓을 때면, 할머니는 "보리쌀 얹혀 먹으면 올겨울은 배고프지 않게 나겠다"며 안도의 웃음을 지으셨다.


브런치 글 이미지 1


호남평야는 우리나라 굴지의 곡창지대였지만, 그 안에서 논 두 마지기 지으며 여섯 식구의 생계를 이어갔던 부모님의 삶은 참으로 고달팠을 것이다. 결국, 내가 국민학교 5학년을 마친 그해 겨울, 논두렁이 꽁꽁 얼어붙은 2월 마지막 날 새벽, 부모님과 할머니는 우리 삼 형제를 서울 가는 완행열차에 태우고 고향 땅을 등졌다.


성애 낀 차창을 소매자락으로 닦으며, 새벽녘 어스름한 안개가 휘감고 있는 고향 들녘을 바라보던 그날은 내 기억 속에서 수없이 들춰본 빛바랜 사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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