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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기환 Mar 19. 2024

덴버 가는 길

3월 첫날. 봄이 싹트기 시작하는 날이지만, 아직은 날이 제법 쌀쌀하다. 인천공항은 언제나 그렇듯이 다국적 사람들로 북적대고 있다. 그들의 두툼한 옷차림새만 봐도 아직은 봄이 저만치 숨어있는 듯하다.


나와 아내, 아들과 딸이 캐리어를 끌고 출국 심사대에 서 있다. 우리 가족이 함께 이곳에 서 있던 때가 벌써 20년 전의 일이다. 설레었지만 조금은 불안하기도 했던 그때의 기억들이 스친다. 아무것도 모르고 마냥 들떠있는 아이들을 데리고 앞으로 헤쳐나가야 할 일들이 가슴에 무겁게 다가왔었다. 


출국 심사를 마치고 면세점이 즐비한 상가에 들어서니 아들과 딸이 그때처럼 들떠서 이곳저곳을 둘러본다. 세월의 흐름만큼 아이들의 모습은 달라졌어도, 그 시절로 돌아간 아이들을 보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날이 어둑해진 뒤에야 출발한 비행기는 밤을 꼬박 새우며 태평양을 건넜다. 12시간 만에 경유지인 캐나다 밴쿠버 공항에 도착했다.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비몽사몽간에 눈을 뜨니 날이 훤하게 밝아있다. 비행기 안 새우잠에 온몸이 찌뿌듯하다. 

밴쿠버는 밤새 비가 내렸나 보다. 대지가 촉촉하게 젖어 있다. 비는 그쳤지만 여전히 하늘이 우중충하다.


비행기 환승을 위해 입국 심사 마쳤다. 덴버 가는 비행기를 타려면 이곳에서  2시간을 대기해야 한다. 공항 대기실은 낯선 이국 풍경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백인과 흑인, 아랍계, 아시안계, 히스패닉계 사람들.... 

낯선 얼굴과 낯선 언어들이 뒤엉켜서 대합실은 온통 시끌벅적하다.

우는 갓난아기를 달래느라 울쌍인 엄마, 그 옆을 빙빙 돌며 천진하게 깔깔대는 아이들, 한 무더기 여인들의 시끌벅적한 수다가 만국 공통의 풍경처럼 친근하고 정겹다.

저 많은 사람들은 어디서부터 무슨 사연을 안고 이곳까지 흘러왔을까? 또 그들은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참으로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다. 여행을 시작하면서 벌써부터 내가 얼마나 작은 공간에서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았는가를 생각게 한다.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절대 볼 수 없고 만날 수도 없는, 사람 사는 풍경들이 눈앞에 펼쳐 있다. 서로 얽히고설키며 살아가는 세상. 그 안에 내가 있다.


덴버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밀물처럼 잠이 쏟아진다. 좁고 불편한 자리에도 불구하고 두어 시간 곤하게 잠이 들었나 보다. 덴버공항에 곧 착륙할 거라는 안내방송에 잠을 깼다. 언뜻 창밖을 내다보니 해는 서서히 서녘으로 지고 있다. 부시도록 하얀 눈으로 덮인 로키산맥이 발아래 펼쳐진다. 하늘에서 바라본 로키산맥  줄기가 장엄하고 신비롭다.


"덴버야, 잘있었니? 많이 보고 싶었다!"


아! 드디어 다시 덴버 땅을 밟는구나!! 가슴이 벅차오른다. 이토록 먼먼 이국 땅에 그리운 곳 하나 있다는 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일이다.

비행기 고도가 낮아지면서 점점 사람 사는 모습을 한 마을이 보이고, 너른 벌판과 호수, 잘 가꿔진 농경지와 대지를 가로지르는 강줄기도 보인다. 공항에 비행기가 착륙할 즈음에는 해는 이미 사라지고, 서쪽 하늘엔 그가 남긴 핏빛 자국만이 진하게 남아 있다.


마음 한 번 먹으니  20 시간도 안 걸리는 곳이건만, 다시 이 땅을 밟는데 무려 20 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참으로 덧없는 것이 세월이다.


 덴버 공항에 착륙하는 비행기에서 본 석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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