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기환 Mar 24. 2024

우리 살던 곳

덴버의 아침이 밝았다. 커튼을 여니 우리 살던 아파트가 아침 햇살 가득 품은 채 한눈에 들어온다. 어떻게 변했을까? 마음이 급하다. 아침도 거른 채 서둘러 우리가 살던 아파트로 향했다.     

우리가 2년을 살았던 이곳은 레이크우드 카운티(Lakewood County)에 자리하고 있다. 덴버시 외곽에 위치한 이곳은 미국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3층짜리 목조로 된 평범한 아파트다. 인근지역에는 비슷비슷한 모습을 한 아파트 단지들이 모여 있어 안정적인 주택가를 형성하고 있다. 특히, 덴버 시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그리 높지 않은 그린마운틴(Green Mountain)이 감싸고 있어 마을 전체가 포근하고 평화로운 느낌을 준다. 단지 내에는 다람쥐가 자유롭게 뛰놀 정도로 숲이 잘 조성되어 있다. 또, 수영장과 스파, 테니스, 농구, 스쿼시, 암벽등반 등을 할 수 있는 체육시설도 잘 갖춰져 있다. 나는 특히 이곳의 스파를 좋아했다. 날씨가 쌀쌀한 날이면 하루의 피로를 털어버리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곳이었다.

    

우리 가족 모두 설레는 가슴을 안고 도착한 그곳은 다행히도 우리들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아파트 외관은 페인트칠을 해서 당시와는 조금 다른 회색 톤으로 바뀌었지만, 길목이나 파고라, 애완동물 쉼터까지 옛 모습 그대로였다. 조금 아쉬운 건, 아파트 이름이 'West Hills'에서 'Glen'으로 바뀌어 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리모델링 후 사업자가 바뀐 것일 게다.  


이름이 바뀐 아파트 전경

   

우리 집 뒤편에는 단지 내 주민들이 공동으로 이용하는 자그마한 런더리(Laundry)가 자리하고 있었다. 지금은 우리에게도 보편화된 시설이지만, 당시 이런 시설이 단지 내에 있다는 것은 여간 편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집 베란다에서 바라다 보이는 런더리는 특히, 눈이라도 많이 오는 날이면 동화 속 공주가 살고 있을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예뻤다. 그 추억 속의 런더리가 '수리 중'이라는 표지판과 함께 조금은 초라한 모습으로 굳게 잠겨있어 아쉬움을 주었다.     

눈오는 날, 런더리의 낮과 밤(2004년)


우리가 살던 집에 지금은 누가 살고 있을까?

궁금한 마음에 2층 계단으로 올라가 살짝 올려다보니 굳게 닫힌 문만 덩그러니 보인다. 혹 그곳에 사는 사람이 문을 열고 나온다면 반갑게 인사라도 하고 싶은 마음 간절한데, 이른 아침 인기척이 없다. 커튼이 드리워진 창문을 바라보니 문득, 낯설고 물선 이곳에서  외롭고 힘든 날들을 이겨내던 아이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학교 가기 싫다고 떼쓰던 딸아이, 아침이면 허둥지둥 스쿨버스를 타러 바삐 뛰어가던 아들의 모습이 보인다. 아빠 생일날, 깜짝 파티를 준비해서 눈물 찔끔 흘리게 해 주던 아이들도 보인다. 유난히도 눈이 많이 내리던 날, 눈사람을 만들며 신나게 마당을 뛰어다니던 아이들의 모습이 어제인 듯 눈에 선하다. 밤새 잠도 안 자고 조잘대던 딸아이와 꼬맹이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하게 들리는 듯하다. 키우던 햄스터가 갑자기 죽던 날, 딸아이가 눈물을 흘리며 사체를 묻어주던 화단에는 여전히 나무 한 그루가 무심한 듯 서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나는 나무를 쓰다듬으며 "잘 커줘서 고맙다"라고  말을 건넸다. 내 말을 알아듣기나 한 것처럼 마른 나뭇가지가 살랑 흔들린다.  


우리 살던 아파트(2024년)

         

이곳에서 2년 간 아이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때론 함께 웃고, 때론 아이들 몰래 눈물도 훔쳤던 그때가 어제인 듯 아련하다. 그런 시절을 거쳐 우리 아이들이 저처럼 잘 성장한 것일 게다.     

아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들은 저마다의 기억을 좇아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연신 카메라를 눌러대고 깔깔댄다. 20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은 덩치 큰 아이들이 그때의 천진한 얼굴로 웃고 있다.     

지금 이 순간, 이 모습이 보고 싶어 우리는 오랜 세월을 두고 이곳을 그리워한 것이겠지......


잔잔한 물결 같은 행복이 뭉클 밀려온다.     

   


이전 04화 잠 못 이루는 덴버의 첫날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