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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기환 Mar 31. 2024

하얀 세상


낯선 곳에서의 잠자리는 늘 불편하고 어색하다. 종일 운전을 했으니 곤하게 잘만도 한데, 깨어보니 새벽 4시가 조금 넘었다. 고단하게 이어질 여행길을 위해서 조금 더 잠을 청했지만, 피곤한 몸과는 달리 좀처럼 잠이 오지 않는다. 옆에서 자는 아들의 코골이도 한몫을 했다. 일어나기에는 너무 이른 새벽이다. 다른 가족들이 깰까 봐 숨을 죽이며 눈을 감고 있는데, 옆 침대에서 엄마를 끌어안고 자고 있던 딸이 부스스 일어나더니,

"아빠! 잠을 제대로 못 잤어요!" 하며 졸린 목소리로 투정을 한다. 인기척에 아내와 아들도 잠에서 깨버리고 말았다.


잠자리에 다시 들기는 이미 틀렸다. 장시간 달려야 할 오늘의 일정을 생각해서, 힘들더라도 일찍 출발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우리는 마치 남몰래 야반도주하는 사람들처럼 서둘러 짐을 쌌다. 호텔에서 제공하는 조식으로 간단히 아침을 때우고 난 후, 캐리어를 끌고 주차장에 나가니 바깥세상이 환하다.

노상에 주차되어 있던 내 차가 하얀 옷을 뒤집어쓴 채 오들오들 떨며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밤새 눈이 많이도 내렸다. 어제 먹구름을 거칠게 몰고 다니더니, 끝내 하늘은 밤새 많은 눈을 쏟아내고 말았다.

앞 유리창의 눈을 털어냈으나, 윈도브러시가 얼어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라운지에서 더운물을 가져다 뿌리고 히터를 틀어 언 창을 녹였다.

이른 새벽, 하늘은 구름을 잔뜩 머금고 있어  별빛 하나 보이지 않는다. 오늘 같은 날, 운전은 더욱 조심스럽다. 가족들에게 애써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춘 채, 서서히 차를 몰고 숙소를 빠져나왔다.


타운을 벗어나니 온 세상이 하얗다. 어스름한 새벽인데도 하얀 눈이 길을 환하게 밝히고 있다. 하얀 세상을 뚫고 달리는 차가 적막한 순백의 세상을 깨우고 있다. 하얀 도화지 위에 까만 줄 하나 그어놓은 길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그 길을 따라 1시간쯤 달려가니 서서히 먼동이 트기 시작한다. 붉은 구름 사이로 햇살이 삐치면서, 동쪽 하늘은 다채로운 채화를 시시각각 그려내고 있다.

아침, 조물주가 광활한 땅과 하늘을 캔버스 삼아 마음껏 붓을 휘두르고 있다.


날이 완전히 밝으면서, 어제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눈앞에 펼쳐진다. 거칠고 메말랐던 땅이 하얀 축복땅으로 바뀌어 색다른 유타의 멋을 보여주고 있다. 두 개의 유타를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도로는 제설이 완전히 되어 있으나, 녹은 눈이 빙판 길을 만들면서 상당히 미끄럽다. 가족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는 내 손이 운전대를 더욱 꼭 부여잡게 한다. 만약 이 눈이 어젯밤이 아닌, 지금 내리고 있다면 운전이 얼마나 힘들겠는가! 그래도 다행이다.

이따금씩 스치는 차가 그나마 위안이 되는, 외롭고 적막한 도로가 끝없이 이어진다. 이토록 긴 노선들을 밤새 제설 작업하느라 수고한 사람들을 생각한다. 어느 곳이든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수고하는 사람들이 있어 세상은 아름답다.


두어 시간을 달려도 하얀 세상은 그대로다. 도로 위 잔설이 녹으면서 도로는 물이 고인 곳이 많아졌다. 큰 트럭이라도 스쳐 지나갈 때면 흙탕물이 온통 차를 덮치기도 한다. 앞 유치창을 덮쳐 시야가 뿌옇게 될 정도로 아찔한 순간도 있다. 주유를 위해 잠시 주유소에 들렀다. 온통 흙탕물을 뒤집어쓴  차의 꾀죄죄한 몰골이 안쓰럽기 그지없다.

네바다에 가까워질 때쯤 되니 하얀 세상이 제법 푸른색으로 바뀐다. 드디어 눈이 오지 않은 세상으로 들어섰다. 시장끼도 때울 겸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변변한 식당도 없어 타코밸리에서 간단한 멕시칸 음식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오늘이 여행 사흘 째다. 무리한 일정에 피곤이 겹치고 있다. 특히, 나는 출국 전 감기몸살 기운이 있어 불안한 마음에 링거까지 맞았었다. 다행히도 거의 회복이 된 상태이나, 오랜 시간 운전을 하다 보니 몸 상태가 정상은 아니다. 오늘 아침, 아내가 감기 몸살 기운이 있다고 하더니, 딸도 목이 칼칼하다고 호소한다. 좁은 공간에서 함께 있다 보니 감기가 옮지 않을까 걱정이다. 먼 이국 땅 여행길에서 누구 하나 아프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가족의 건강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시간이 아깝다며 잠을 자지 않겠다던 아내와 딸이 감기 기운 때문인지, 점심을 먹고나더니 이내 잠 속으로 곯아떨어진다. 아빠를 지켜야 한다며 말동무를 해주던 옆 자리의 아들도 피곤한지 꾸벅꾸벅 존다.


"그래, 자라! 푹 자고 나서 감기 기운 다 떨쳐버려라!!"


차는 유타를 벗어나 네바다주로 들어서고 있다. 여기서 라스베이거스가 멀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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