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지브리 애니메이션 감상
때는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쯤, 고등학생 때로 기억한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예전에는 기말고사가 끝나고 방학을 앞둔 시기가 되면
진도가 빠른 과목일 경우, 수업시간에 교실에서 영화를 틀어 놓고 시청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당연하게도 이런 시기에는 교실 분위기도 자유롭기 때문에,
나는 친구들과 함께 몰래 교실을 빠져나와 놀러 다니기 일쑤였다.
그렇게 그날도 교실에 영화를 상영했고, 그 틈을타 밖에서 신나게 놀다 들어온 날이었다.
눈치를 보며 조용히 나의 자리로 돌아가 착석하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교실 앞 스크린에
상영 중인 영화에 눈을 돌렸다. 하지만 그날은 특이하게도 영화가 아니라 만화였다.
나는 곧바로 만화에 집중하고 있던 옆 짝꿍에게 물어봤다.
"저게 뭐야? 누가 갖고 왔어?"
"너 저거 몰라?, 봐바 재밌어!"
"에이 뭔 만화야~ '반지의 제왕'같은 거나 틀어주지...'
조금은 심드렁한 기분으로 눈을 돌려 만화를 보았다.
한 소녀가 거대한 대중목욕탕에서 거대한 쓰레기 더미를 뽑아내는 장면이었다.
그리고 그 후 이어지는 이야기와 그림들은 너무나도 흥미로웠고, 음악마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애니메이션이라고는 어릴 적 보던 변신 로봇만화가 전부였던 나에게 있어,
이 만화는 구성하는 모든 요소가 나에게 너무나도 신선했고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당연하게도 나는 이 만화에 빠져드는데 채 5분도 걸리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 내가 겪은 느낌이 바로 '컬처 쇼크'라는 것이 아니었나 싶다.
안타깝게도 수업시간 50분은 한 작품을 끝까지 관람하기에는 턱없이 짧은 시간이었다.
더군다나 나는 작품의 시작조차도 밖에서 놀다 오느라 보지 못했으니, 정말 어중간하게
시청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재미있었다, 너무 재미있었고,
그리고 너무 궁금했다.
나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교실 스크린을 정리하던 친구에게 달려가 물어보았다.
"이거 제목 뭐야?"
"으응?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센과 치히로... 고마워!!, 혹시 나 이거 빌려 줄 수 있어?"
"응, 다 보고 돌려줘"
"응! 고마워! 다음 주에 바로 갖다 줄게!"
나는 그날 방과 후 학원이 끝나기를 얼마나 기다렸었는지 모른다.
조금 부끄러운 얘기지만, 내가 하두 학원을 빠지고 도망가서,
부모님께서 학교 앞으로 차가 오는 학원을 보냈었다.
본래는 학원이 끝나고 차를 타고 집까지 귀가시켜주는 그런 학원이었는데,
나는 학원차를 타지 않고 천천히 집까지 걸어가는 걸 좋아했다.
또한 어쩌다가 학원차를 타는 날이면, 부원장 선생님께 아이스크림을 사달라는 둥,
드라이브를 가자는 둥, 씨알도 안 먹힐 농담을 하며 선생님을 귀찮게 했었는데...
(학원차를 운행하시는 분이 부원장 선생님 이셨다.)
웬일로 그날은 집에 빨리 가자고 보채니, 부원장 선생님도 어리둥절해하시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온 나는 온 가족을 다 불러 모아
재밌는 걸 가져왔다고, 거실에 앉아 그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봤던 기억이 난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지만, 내가 처음 접한 지브리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내가 뭘 기대했던 기대이상이었다.
결말부 하쿠와 치히로가 서로를 의지한 채 하늘을 나는 장면을 보며,
얼마나 내가 가슴 벅차했던지, 지금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다.
그날 이후로 지금까지 나는 지브리 애니메이션을 정말 좋아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최근 작품인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아직 보지 못했지만,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꼭 보고 싶다.
평가가 어떻든 호불호가 어떻든 분명 언제나 그랬듯 내게는 재밌는 경험이 되리라 생각한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은퇴하지 않고 오래오래 살아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같은 작품을 하나만 더 만들어 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