팃포탯 전략 tit for tat
여러 전공의 수혜
봄이 오다가 다시 뒤로 물러났다. 창가에 조용히 내리던 눈은 자고 일어난 사이 어느새 세상을 온통 하얗게 뒤덮어 버렸다.
미아 선생과의 이별은 그녀의 대학원 진학과 나의 전출 발령으로 소식이 끊어졌다. 그 후 20 년이 지나고 새로운 곳에서 만나게 되는 셈이다. 어디서 시원되어 이어진 인연의 끈인지를 생각 하면서 다시 같이 근무 하게 된 것에 의미를 부여하며 그녀가 어떻게 변화 했는지 궁금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녀는 발령지 학교의 가장 바쁜 신학기 준비
일에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 개학일에도 오지 않아 업무 조정에서도 불편함을 주었고 거의 업무에서 제외되다
시피 하였지만 어쩌면 결과적으로 그녀 입장으로 볼 땐 매우 편하고 잘 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해 나는 다리 수술을 하여 병가를 내고 나가지 않아야 했었다. 그러나 나는 일 년의 학교 업무 토대를 조직하고 조정하는 위치에 있어서 자유롭지 못하였다.
결국 학교 신학기 업무가 바쁜 것에 마음이 쓰여 발깁스
를 한 채로 휠체어를 타고 근무를 하였다. 하지만 다리 를 무리하게 사용하여 3월 중순 임시 교사를 구하고 병가를 내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 해는 주당 19시간이 배당되었다. 1시간도 더 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팽배하여 협의가 도출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이 든 사람이 더 한다는 생각으로 교과에서 최다 시수를 가져왔지만 씁쓸함을 금할 수는 없었다. 몸이 아파도 아랑곳 않는 냉정한 인심에 회의도 들었고
해마다 양보하는 자신이 오지랖이긴 하지만 세상은 갈수록 첨예하게 각박해지고 있었다.
하루만 얼굴에 철판 깔면 일 년이 편하다는 단순한 논리를 추종하고 실천하며 사는 사람들 속에서 늘 마음 약한 사람이 무거운 것을 짊어지는 것은 어느 조직에나 있을 것이니까.
미아 선생은 예비시간표가 운영되는 일주일 기간에도 오지 않았고 결강은 계속되었다. 교무실은 그녀가 등장하기도 전에 이미 그녀가 화제가 되고 있었다.
그녀의 전공이 제2 외국어 독일어에서 일본어로 바뀌어 있었다. 왜냐 하면 독일어 선택 수강자가 감소하여 교육과정에서 소멸되었기 때문에 단기간의 일본어 연수를 통해 일본어 교사로 전환된 것이다.
인문고에서는 교양학군 교과는 거의 자습 수준으로 운영되는 실정이었고 입시 교과에 비해 교과 부담은 별로 없는 편이었다. 1학기 수업시수 안배에서도 입시 과목 다른 사람은 주당 18ㅡ19시간인데 미아 선생은 13시간으로 배정되어 있었다.
3월 중순 그녀가 출근함으로써 우리는 만났고 그녀는 의사인 독일 남자와 몇 년 전에 결혼하였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런데 그녀는 더 현실적이 되어 있었다. 내가 병가 낸 틈에 그녀의 창체 동아리 시간의 수업을 선택한 학생 들을 나의 동아리로 몰아 보냄으로써 자기 개설 동아리는 인원 미달로 폐강 되게 하여 결국 동아리 1시간을 하지 않는 것으로 일을 도모하였다.
영악한 그녀는 최소 13시간이면서 1시간을 안 하려고 나의 부재를 이용하여 지인에게 시수를 전가한 셈이다. 결국 그 해는 그녀 덕분으로 건강하지 못한 몸으로 주당 20 시수를 해야 하는 곤혹스러움을 경험하였다.
당시 그 학교는 15 교육과정 시범학교였다. 미아 선생 은 13 시간으로 1학기를 하고 2학기에도 그 시수대로 운영되는 묘한 시범 교육과정의 혜택을 누리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 비해 시간이 여유로운 미아 선생은 시인
임을 자처하며 모든 화제는 시인에서 출발했고, 그다음 레퍼토리는 독일 의사 남편 이야기를 꺼내면 들어줘야 한다는 것은 후배 여교사들에겐 고충이 되어 버렸다. 심지어 교무실의 여선생들은 그녀를 기피하고 다녔으나 나는 그런 그녀를 속없이 방패막이 역할을 많이 해 주었다. 이는 어쩌면 물러 터진 내 성격 때문 인지도 모른다.
독일에 가서 한국어 교사를 하겠다고 그 자격 과정을 슬며시 전가하여 사이버 학점 이수에 필요한 시험이나 리포트를 도움받아 무임승차 하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질문을 해서 조력하였다. 이를 시작으로 한 학기가 지나며 바쁘다는 이유로 과제를 해주는 게 당연
하다고 여겼고, 시간이 흐를수록 호구로 알고 사람을 적당히 이용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예전에 비해 더 노골적이었다. 앞에서는 위하는 척, 말로는 언니. 언니 하면서 자기 손해는 절대 보지 않는 그녀만의 삶의 철학이 있었음을 일찍 간파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우연히 교감 선생과 함께 나를 뒷담하고 있는 것을 직접 들킨 이후로는 갖은 아양을 떨며 몸에 손을 대는 등 보여주기식으로 더 친한 척하며 교무실에서 너스레를 하기도 하였다.
한 두 번은 참았다. 그러던 중 부장 모임에서 교육 과정을 비정상적으로 운영하려는 안건에 대해 제동을 걸고 바로 잡으려고 건의를 한 적이 있었다.
한국사의 시수를 줄이고 일본어를 3학년 2학기에 4시간이나 배정하여 증가시킨 것이었다. 그것도 한국사 교과의 양해나 동의도 없이 몰래 진행하고 있었다. 협의회에서 배정사유를 질문하고 편성 잘못을 언급했다.
언급한 이유는 인문고에서 3 학년 2학기에 편성한다는 것은 일본어 수업을 그저 날로 먹겠다는 심산이기 때문이다. 설령 괜찮다 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한국사는 대학수능교과로 필수 과목이란 점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었다.
수능교과를 3학년에서 그 시수를 감소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인데, 수험생들의 생각은 아예 하지 않고 자기들 밥그릇 챙기고 있는 것도 문제이지만, 그걸 그대로 통과시키는 사람은 무얼 생각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난 문제 제기를 했던 것이다. 조심스레 교육 과정의 선정과 조직의 중요성을 조용히 이야기했을 뿐이다. 충분히 말할 권한과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 퇴근 무렵 쿵작이 맞는 두 사람이 뒷담하고 있는 걸 내가 우연히 듣게 되었다. 그래서 뒷담의 근거와 이유를 말하라 했더니 그녀는 거느린 미소를 띠면서
"언니? 그것 갖고 뭐 그러냐고?" 하는 것이었다.
순간 나는' 상종하지 말아야 할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앞에서는 나를 함부로 대하지 않았지만 뒤로는
함부로 이야기하는 재주가 있었기에 이를 계기로 하여 그녀와는 거리 두기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접근을 경계하기 위해 그녀에게만
팃포탯 tit for tat 전략을 사용하기로 하였다.
상대가 가볍게 치면 나도 가볍게 친다는 상대가 자신에게 한 그대로 갚는 맞대응 전략을......
그녀가 나를 호구로 안 것은 타인에 대한 친절과 거절을 못하는 성향 탓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 학교에서 열리는 각종 중요 회의에 참가하여 논제에 대한 협의를 하면 이제 그녀는 나의 의견에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곤 했다. 명백히 하지 말아야 하는 것도 해야 한다는 얼토당토않은 의견을 내는 것이다.
난 그녀를 향해 직접 말하지 않고 관리자에게 하지 않아야 할 이유를 말하고 그녀를 상대하지는 않았지만 그녀에 대한 실망은 날로 커져 갔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늘 시인이라 자처하는 그녀가 진정 시인이라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는 범하고 싶지 않지만, 그녀는 시정신이 없는 시인이다고 판단 가능 했다. 한갓 명예나 경력에 시인이라고 한 줄 삽입 하여 자신의 홍보용 액세서리처럼 사용하는 시인 말이다.
미아 선생은 여전히 승승장구하고 있다. 제2 외국어 선택 수업 감소에 따라 미아는 방학기간 연수를 통해 일본어를 전공으로 언젠가 바꾸었는데 또 일본어 선택이 교육과정에서 희소하게 되자 이번에는
미술로 부전공을 바꾸어주는 교육부의 은혜를 한 몸에
받으며 전공 자격 3개를 지닌 거대 교사가 된 축복의
잔을 음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