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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희준 Feb 26. 2024

63화. 용

<흑마법서> 소설 연재

 혜성은 눈을 떴다. 사방이 캄캄했다.


 그는 신음하며 몸을 일으키려다가 머리가 욱신거려 다시 뻗어버렸다. 뒤통수를 만져보니 손에 피가 묻어났다. 군인에게 곤봉으로 맞은 곳이었다.


 혜성이 누워 있는 곳은 사방이 막힌 좁은 방 안이었다. 그는 차가운 돌바닥 위에 누워 있다가 어딘가에서 들리는 울음소리에 놀라 흠칫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서 누군가가 울고 있었다. 짐승이 우는 것 같으면서도 처량한 울음소리였다.


 그때 독방의 문이 열리면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혜성은 눈을 찡그렸다.


 “끌어내.”


 문 앞에 선 누군가가 명령했다. 그러자 도깨비 두 명이 들어와 혜성을 양쪽에서 붙잡고 일으켜 세웠다.


 혜성은 그들에게 붙들려 질질 끌려갔다. 그들은 지하 감옥의 복도를 가로지른 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드디어 죽는 건가. 죽으러 가는 모양이군.’


 하지만 그런 생각에도 그는 아무 감정이 들지 않았다. 단지 뒤통수의 고통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마침내 혜성이 도착한 곳은 넓고 호화롭기 그지없는 방이었다. 방문 옆의 욕실에서는 누군가가 샤워를 하는 모양이었다. 혜성을 붙들고 있던 사람들이 그를 방 한가운데에 내려놓고 뒤로 몇 발짝 물러났다.


 물소리가 그치고 잠시 후 욕실 문이 열리더니 알몸의 남자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도깨비 치고도 키가 크고 온몸이 다부진 근육질의 젊은 남자였다. 남자는 혜성과 나이가 비슷하거나 몇 살 정도 더 많아 보였다. 그는 혜성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김혜성, 만나서 반갑다.”


 날카로운 저음의 목소리였다. 혜성은 눈을 찡그렸다.


 “한 번쯤 만나서 인사를 하고 싶었거든. 가족 간에는 그게 예의잖아.”


 남자는 혜성에게 등을 돌리고 의자에 걸려 있던 옷을 집어 들었다. 그러자 남자의 등에 가득한 문신이 드러났다.


 혜성은 눈을 치켜떴다.


 남자의 등에는 특이한 마법 문자들이 빼곡히 새겨져 있었다. 그중에 몇 글자는 혜성이 알아볼 수 있었지만 대부분은 처음 보는 문자였다. 혜성은 한눈에 그것이 초고대의 마법 문자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남자의 등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가 살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신비로운 주문이었기 때문이다.


 혜성은 남자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당신은......”


 혜성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남자가 바지를 입고 가운을 걸치더니 혜성에게 돌아섰다.


 “바닥에 그렇게 앉아 있지 말고 여기 좀 앉지 그러나? 매제랑 한 잔 하고 싶은데.”


 혜성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신이 하선이야? 윤이의 사라진 오빠 말이야.”


 남자가 다시 미소를 지었다.


 “역시 머리가 좋은데? 괜히 하루아침에 불사신 서점의 사장이 된 게 아니었어. 자, 와서 앉아.”


 혜성은 그가 가리키는 대로 탁자 앞의 의자에 앉았다. 하선은 혜성에게 다가와 그의 턱을 잡고 얼굴을 이리저리 살펴봤다.


 “잘생기긴 했는데 너무 예쁘장하게 생겼는데. 내 동생의 취향이 이런 스타일이었구나.”


 혜성은 고개를 뒤로 빼서 그의 손에서 벗어났다. 그 모습에 하선은 웃음을 지었다.


 “미안, 얼굴이나 몸을 꼼꼼히 살펴보는 게 내 직업병이라서.”


 “당신 직업이 뭔데?”


 “윤이랑 같아.”


 “당신도 왕이야?”


 “비슷하지. 나도 기업 오너니까.”


 “무슨 기업인데?”


 “너도 잘 알 걸? 유명한 회사거든.”


 혜성은 눈을 찌푸렸다.


 “어떤......”


 “매자.”


 그 말에 혜성은 깜짝 놀랐다.


 “매자라고? 그 노예 매매 회사?”


 “응. 난 매자의 창업주이자 대표야.”


 하선은 자랑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내가 알기로 매자의 창업주나 대표는 다른 사람인데......”


 “걔네는 바지사장이지. 내가 창업주이고 실질적인 대표야. 난 별로 알려지고 싶지 않았거든. 너도 짐작하겠지만 여러 가지 사정이 있어서 그래.”


 혜성은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그는 충혈된 눈으로 하선을 빤히 바라보았다. 가까이에서 본 하선의 얼굴은 하윤과 많이 닮아 있었다.


 “윤이는 당신이 이러고 있는지 모르는 것 같던데.”


 “당연히 모르지. 아는 사람 자체가 거의 없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뭐가?”


 “당신 동생은 노예제에 반대하고 도깨비들의 인권을 위해서 노력하는데 당신은 악마 같은 노예 매매 회사를 세웠다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그러자 하선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진심으로 즐거워하고 있었다.


 “내 동생이 널 왜 좋아하는지 이제 알겠다. 얼굴만 반반해서 좋아하는 게 아니었구나. 생각하는 것도 비슷하네. 인권이 어쩌고, 노예제가 어쩌고.”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야?”


 “어떤 짓?”


 “왜 이런 잔인한 기업을 만들었냐고.”


 “‘잔인하다’는 말이 성공적이라는 뜻이라면, 칭찬으로 받아들일게.”


 “내가 장난치는 것 같아?”


 “나도 장난치는 거 아니야.”


 하선은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가 미소 짓자 하윤과 더 닮아 보였다. 혜성에게 익숙한 미소였다. 그의 약혼녀의 부드럽고 순수한 웃음. 놀랍게도 하선의 표정에는 일체의 악의도 없었다.


 “나는 나 정도면 성공한 사업가라고 생각해. 근데 어떤 사람들은 우리 회사가 잔인하다고 하더라. 너처럼 순진한 이상주의자들 말이야.”


 “이상주의자?”


 “그래. 노예제는 명백히 합법이고 나 역시 합법적인 사업을 하고 있는 건데, 마치 세상이 무너지기라도 하듯 소리를 지르는 사람들. 윤이가 어렸을 때부터 그랬어. 그리고 내 부모 역시 마찬가지였지. 난 어렸을 때부터 내가 왕이 되면 매려를 아주 효율적으로 경영하겠다는 비전을 갖고 있었어. 하지만 내 아버지는 나랑 많이 달랐지. 제국에 협조하려 하지 않았고, 노예제 역시 싫어했어. 아버지의 그런 기조를 지금 내 동생이 충실하게 이어받았지. 그렇게 보면 처음부터 윤이가 왕위 계승자로 적절했다고 봐.”


 “그래서 궁전에서 사라졌던 거야?”


 “사연이 길어. 하지만 짧게 요약하면, 난 태어날 때부터 그쪽 세계랑 안 맞았어. 넌 모르겠지만 왕자로 산다는 게 생각하는 것만큼 좋진 않거든. 가끔은 미칠 것만 같지. 그래서 이대로 왕이 된다면 내 인생은 죽을 때까지 답답할 거라고 생각해서 자유를 찾아 궁전을 뛰쳐나왔어. 궁전을 나오니까 비로소 자유를 느꼈지. 바깥세상에는 내가 그토록 갈망하던, ‘자유’가 있었거든.”


 “자유를 찾는 건 좋은데 네가 이런 회사를 운영한다는 걸 알면 부모님과 동생이 실망하지 않겠어? 그들은 제국에 협조하지 않아서 엄청난 고초를 겪었다고.”


 그 말에 하선의 얼굴에 비웃음이 번졌다.


 “꼭 우리 어머니처럼 말하는군. ‘네가 그러면 아버지께서 실망하시지 않겠니?’”


 그는 어머니의 말투를 흉내 내며 말했다.


 “김혜성, 내가 너한테 인생의 중요한 법칙을 하나 알려줄게. 넌 단 한 번밖에 살지 못해. 그리고 인생은 짧고, 넌 언젠가는 반드시 죽어. 어쩌면 내일 당장 죽을 수도 있어. 그러니까 네가 하고 싶은 거라면 뭐든지 하고, 갖고 싶은 건 뭐든지 가져야 돼. 난 궁전을 나온 후 그렇게 살았어. 그게 무엇이든, 술이든 여자든 돈이든, 내가 원하는 건 뭐든지 움켜잡았지. 윤이를 봐. 너도 봤을 거 아냐. 왕으로 산다는 건 매 순간이 인내하고 고민하는 시간이야. 도대체 왜 그렇게 살아야 돼? 행복이 바로 눈앞에 있는데 그걸 거부하는 바보들이 이 세상에는 너무 많아. 특히 이 나라에는 말이야. 독립운동이나 노예제 반대론자, 그런 놈들은 심지어 도덕적 우월감까지 대단하다고. 우리 이제 그런 짜증 나는 것들은 그만 치우면 안 될까? 김혜성, 넌 똑똑하니까 뭐가 좋은지 판단할 수 있잖아.”


 그는 술잔을 내려놓고 혜성의 눈을 들여다봤다.


 “넌 나랑 많이 닮았어. 그게 본능적으로 느껴져. 너도 부모와 사이가 별로 안 좋았지? 그랬을 것 같은데?”


 혜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도 원하는 걸 갖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잖아. 애초에 내 동생과 약혼을 한 것도 그 때문이지. 넌 책을 만들고 싶어 하잖아. 흑마법서 말이야.”


 그 말에 혜성은 두려움을 느꼈다. 하선은 그런 그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난 너에 대해서 네 생각보다 많이 알고 있어. 사실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지. 넌 유명 인사니까. 넌 나랑 많이 닮았어. 너 역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네가 원하는 걸 가지려 하지만, 네가 가진 웃기는 사상이 네 발목을 붙잡는 거지. 그거 하나만이 너와 나의 유일한 차이점이야. 그래서 넌 네가 원하는 걸 얻지 못하는 것이고.


 네가 용산에 온 이유도 아마 붕새의 여의주와 관련이 있겠지. 그걸 찾았나?”


 혜성은 더욱 큰 두려움을 느꼈다. 그는 침착하려고 애쓰며 말했다.


 “아직 못 찾았어. 그리고 내가 여기 온 건 여의주 때문이 아니야.”


 “정말? 그럼 용산에는 왜 왔는데?”


 “내가 지금까지 쓴 주문이 담긴 수첩을 도둑맞았어. 근데 그걸 용산 경찰서에서 찾았다고 해서 찾으러 온 거야.”


 “네 몸에서 수첩 같은 건 나오지 않았는데.”


 “서점으로 먼저 옮겼으니까.”


 “차원문을 통해서 말이군. 그렇다면 붕새의 여의주 역시 지금 불사신 서점 안에 있겠네.”


 “그건 아직 못 찾았다니까.”


 “날 속이려고 하지 마. 네가 천하기둥 때문에 노예까지 됐던 건 유명한 사실이잖아.”


 혜성은 그가 자신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모험을 해보기로 했다.


 “천하기둥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어.”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고?”


 “정말이야.”


 “헛소리하지 말고 빨리 말해. 난 매제를 고문하고 싶지는 않거든. 붕새의 여의주를 찾았지?”


 “아니라니까. 나도 아직 찾고 있다고.”


 혜성이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그걸 계속 찾고 있지만 아직 석판조차 찾지 못했어.”


 “정말?”


 “정말이야. 그러는 넌 붕새의 여의주에 대해서 어떻게 알아낸 거야?”


 “내가 너한테 하고 싶은 질문이군. 난 매려의 왕자로 태어났어. 어렸을 때부터 초고대와 관련된 자료를 많이 접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운 좋게 단서를 발견했던 거지. 넌 어떻게 알았어?”


 “인터넷에서 어쩌다가 찾아냈어.”


 그 말에 하선은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그 말을 믿으라는 거야?”


 “정말이야. 인터넷에는 없는 게 없잖아. 제국과의 계약을 거절하고 위기에 몰렸을 때 직원들이랑 같이 해결책을 찾다가, 붕새의 여의주에 대한 단서가 천하기둥 안에 있다는 걸 어딘가에서 보고 여왕에게 접근했던 거야.”


 “재미있군.”


 하선이 술을 들이켰다.


 “그래서 넌 여의주를 갖고 있지도 않고, 그게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


 하선은 한숨을 쉬었다.


 “너라면 여의주에 대해서 뭔가 좀 알고 있나 싶었는데......”


 “그걸 찾아서 뭘 할 건데?”


 “뭘 하긴, 그건 엄청난 마력원이잖아. 그리고 난 사업가라고.”


 “결국 돈 때문이군.”


 “세상에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을까? 너도 마찬가지일 거 아냐.”


 “날 끌고 온 것도 돈 때문이야? 왜 날 끌고 온 거지?”


 “그야 네가 붕새의 여의주에 대해서 뭔가를 알고 있지 않을까 싶어서 데려온 거지. 근데 넌 지금 당장은 말하고 싶지 않나 보군. 괜찮아, 시간은 넉넉하니까. 천천히 말해도 돼.”


 “날 고문할 건가?”


 “그건 네 혓바닥에 달렸어.”


 “내가 아는 건 다 말했어. 나도 여의주를 열심히 찾았지만......”


 “아, 그런 얘기는 나중에.”


 하선이 술잔을 들었다.


 “오늘은 우리끼리 천천히 한 잔 하자고. 처음 만난 날부터 일 얘기를 하는 건 피곤하잖아. 나도 너한테 궁금한 게 많기도 하고 말이야.”


 “나에 대해서 뭐가 궁금한데?”


 하선은 혜성을 잠시 응시하다가 씩 웃었다.


 “내 동생을 좋아하긴 해?”


 “그게 왜 궁금한데?”


 “내가 오빠인데 그 정도는 물어볼 수 있는 거 아닌가? 게다가 넌 윤이한테 계획적으로 접근했잖아.”


 혜성은 시선을 돌렸다.


 “좋아하나 보군.”


 하선은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내가 왜 너한테 끌려온 거야? 난 제국군한테 붙잡힌 것 같은데.”


 혜성이 물었다.


 “내가 제국의 요직에 있거든.”


 “네가? 왜?”


 “그야 난 제국의 핵심적인 노예 공급자 중 한 명이니까. 그래서 잠깐 손을 써서 널 빼냈어. 제국한테 넌 말 안 듣는 꼬마에 불과하지만 나한테 넌 소중한 매제니까.”


 “제국군이 왜 사람들을 공격하는 거야? 대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하선이 혜성의 잔을 가리키며 물었다.


 “술 안 좋아해?”


 “당연하지.”


 “저런, 오늘 같은 날에 술이 필요한데. 오늘은 중요한 밤이거든.”


 하선은 술을 한 모금 마시더니 말을 이었다.


 “제국의 추축국 동맹이 전부 무너진 거 알지?”


 “물론.”


 “소화 제국은 지금 경제를 비롯한 모든 면에서 총체적 난국이야. 그래서 이 난관을 이겨내기 위해 계속해서 전쟁에 몰두하고 있는데, 이제는 그 전쟁마저도 패하기 직전이지. 나라면 제국이 한 달 안에 연합군에게 패할 거라는데 큰돈을 걸겠어. 하지만 황제는 끝까지 포기할 생각이 없나 봐. 그 사람들은 지금 죽어가기 직전에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어.”


 “그럼 지금 시민들을 때려잡고 있는 이유가 뭐야? 그거랑 관련이 있나?”


 “물론 관련이 있지. 엄밀히 말해서 때려잡는 게 아니야. 시민들을 집단 납치하고 있는 거지.”


 “납치?”


 “오래전, 제국은 아시아 원정 도중 초고대의 문서를 하나 발견했어. 제국의 학자들은 그 문서를 해독하려고 오랫동안 애쓰다가 최근에야 해독했는데, 그 책에 따르면 44만 4400명의 목숨을 동시에 바치는 의식을 하면 초고대에 멸종한 용을 소환할 수 있다는군.”


 “뭐라고?”


 혜성은 경악했다.


 “그럼 설마......”


 “그 책의 진위를 감정한 제국의 역사학자들이 믿을 만한 정보라고 황제에게 전달하자 황제가 얼마 전에 명령을 내렸어. 그 일을 시행하라고 말이야. 내가 말한 최후의 발악이 바로 그거야.”


 “그럼 지금 44만 명의 시민들을 죽여서 용을 만들어내려고 하는 거란 말이야?”


 “네가 생각해도 웃기지?”


 하선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만약 소화가 용을 만들어낸다면 수세에 몰린 소화가 단숨에 역전할 수 있을 테니까. 용은 그렇게 강력한 생물인 거야.


 전쟁이라는 게 그렇게 웃기다니까. 물론 나도 그 초고대 문서의 내용이 잘못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나도 붕새의 여의주를 찾고 있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그걸 진짜로 실행한다는 건 보통 사람은 하기 힘든 발상인데, 확실히 황제가 급하긴 급했나 봐. 황제는 포로수용소에 노예들을 최대한 모은 다음에 노예와 포로들을 동시에 죽여서 인신공양 마법을 하라는 명령을 내렸어. 용산뿐만이 아니라 제국 곳곳에 있는 여러 감옥과 포로수용소에서 이 일은 동시에 진행되기로 했지. 그런데 하필 용산 수용소에서 작업이 이뤄지던 중 노예와 포로들이 담을 무너뜨리고 탈출해 버린 거야.”


 혜성은 자신이 식당 앞에서 본 광경을 떠올렸다. 회색의 죄수복을 입은 사람들이 무언가로부터 정신없이 달아나고 있었다. 그게 그 탈출 직후의 상황이었던 것이다.


 “근데 제국은 죄수가 아닌 시민들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던데......”


 “그야 상황이 그렇게 되어 버렸으니까 시민과 죄수를 가리지 않고 끌고 가려고 했던 거지. 근데 네가 용산 역에서 수천 명을 피신시키는 바람에 제국 입장에서는 상당히 아까운 일이 되어 버렸어. 그래도 지금쯤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끌고 가고 있으니까 머지않아 필요한 인원을 다시 채우지 않을까?”


 하선은 그렇게 말하며 다시 술을 들이켰다.


 “황제가 필요한 목숨을 모두 얻어서 초고대의 금지된 마법을 쓴다면, 혹시 또 모르지, 용이 정말로 만들어질지 말이야. 그래서 용이 전투에 나서게 된다면 이 전쟁도 쉽게 끝나지는 않을 것 같아. 어때, 정말 역사적인 날 아닌가?”


 어디선가 멀리서 다시 비명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혜성은 몸을 떨었다.


 “술은 손도 안 댔네. 좀 마셔두는 게 어때? 이게 아마 네가 죽기 전에 마실 수 있는 마지막 술일 텐데. 너 내일부터 좀 바쁘거든.”


 “난 아는 걸 다 말했어.”


 “그런지 아닌지는 곧 알게 되겠지.”


 하선이 잔잔한 미소를 띤 채 말했다.


 “매제, 더 할 말 없나? 아니면 더 듣고 싶은 말 없나?”


 혜성은 떨리는 손으로 술잔을 들어 한 입에 털어 넣었다. 그는 잔을 내려놓은 뒤 물었다.


 “네가 김지훈을 죽였어?”


 그 말에 하선의 얼굴이 굳어졌다.


 “김지훈? 노예해방전선의 지도자 말인가? 김지훈이라...... 그 녀석 이름을 오랜만에 듣는군. 죽이고 싶었지. 하지만 난 그 녀석 얼굴도 본 적 없어.”


 “네가 그를 납치한 거 아니야?”


 “그랬으면 좋겠군. 하지만 난 아니야.”


 하선이 근처에 서 있던 부하들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그들은 혜성을 의자에서 끌어내 붙잡았다.


 “오늘은 푹 쉬고 내일 다시 보자고.”


 하선이 손을 흔들었다. 혜성은 그 방에서 끌려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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