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밝은 세상으로 나아갈 일만 남았다
『여수의 사랑』을 읽는 데 꼬박 12일이 걸렸다.
평소 책을 처음 읽었을 때 내 마음에 스며들기 시작하면 속독하는 경우가 많기에 12일이라는 시간은 물리적으로 좀 오랜 기간이기는 하다.
그래서 더 좋았다.
천천히 음미하면서 곱씹으면서 읽을 수 있었으니.
이런 게 가능했던 이유는 혼자가 아니라 함께였기 때문이다.
누군가 함께 읽기를 제안해 주지 않았더라면, 주도적으로 추진해 주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혼자서는 읽으려고 시도조차 안 했을지도 모른다.
이미 읽을 책은 산재해 있었고, 한강 작가의 책들은 나중에 읽으리라 생각하고 분명 미룰 심산이 컸으니까 말이다...ㅎㅎㅎ
게다가 책을 다 읽고 나서는 온라인 독서 모임을 통해 그동안 읽은 소회들을 풍성하게 나누는 시간을 가져서 더 의미 있었다~♡
『여수의 사랑』이 책에는 <여수의 사랑> <어둠의 사육제> <야간열차> <질주> <진달래 능선> <붉은 닻> 이렇게 총 6개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우리는 각각의 단편을 이틀에 걸쳐 읽고 다 읽은 후에는 기억에 남는 문장과 소감을 온라인 독서 플랫폼에 남기며 소통했다.
첫날 첫 단편 <여수의 사랑>을 읽고 난 반응들은 다양했다.
"어째 한강 작가는 초기작부터가 인물들이 다 평범하지 않네요."
"작가의 머릿속이 궁금해집니다. 노후의 한강 작가의 작품은 어떤 것일지도 궁금합니다."
"읽는 내내 눈물이 나서 몇 번을 멈추다 읽고 의식적으로 딴짓해 봅니다.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한 가지 공통된 반응은 한강 작가의 세밀한 묘사가 돋보이는 유려한 문장에 탄복했다는 것이다.
"한강 작가의 묘사가 너무 멋지죠. 먼 하늘로부터 춤추며 내려와 흐느끼듯 스민다... 어쩜 이런 표현을 쓸 수 있을까요?"
"전철 속에 비치는 낯선 얼굴들, 갈 곳을 잃은 사람처럼 망연히 서 있는 나의 모습... 문장이 저절로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 같아요."
"저도 첫 문장부터 작가의 표현력에 엄청 놀라면서 읽어요. 초기작부터 어마어마한 작가였다는 생각에 엄청 놀라며 읽고 있어요."
"초반부터 강렬합니다. 쉬이 읽히는 소설과 달리 문학이란 이런 것이구나 느낄 수 있었어요."
"문장 하나하나가 다 주옥같네요."
"비유적 표현들이 어찌나 찰떡같은지 계속 흥미진진하게 읽고 있어요."
"진짜 묘사가 기가 막히네요. 마치 글로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 같아요. 문장에 홀릭 중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참여자 중에는 평소 소설을 많이 읽은 분들도 있었겠지만 대부분 자기 계발서 같은 책만 읽다가 이런 책을 읽으니 표현력에 놀라고 글은 이렇게 쓰는 거구나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서로 기억에 남는 문장을 고를 때는 같은 문장을 선택한 것을 보고 웃기도 하였다. 이게 함께 읽기의 묘미인 것 같다^^
한강 작가의 소설은 빼어난 표현력이 다가 아니었다. 인물 간에 촘촘히 짜인 서사와 스토리가 책을 읽는 내내 몰입하게 만들었고 매일매일 읽을 분량이 있었음에도 그 분량을 초과해서 읽고 싶게 만들 만큼 흡인력이 있었다.
다 읽고 나서 여섯 개의 단편들은 분명 각각의 다른 이야기인데도 등장하는 인물들이 같은 인물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서로 닮아있다는데 놀랐다.
…… 오래 못 있을 것 같아요.
자흔의 마지막 독백을 들으며
나는 어렴풋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에게는 미래가 없는 것이었다.
무엇이 젊은 그녀에게서
미래를 지워내 버린 것인지,
아무런 희망 없이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옮겨 다니게 하는 것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자흔이 지쳤다는 것,
이십몇 년이 아니라 천 년이나 이천 년쯤
온 세상을 떠돌아다닌 사람처럼
외로워하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여수의 사랑> 33~34p-
<여수의 사랑>의 자흔과 정선, <어둠의 사육제>의 영진과 인숙 언니, 명환, <야간열차>의 영현과 동걸, <질주>의 인규와 진규, <진달래 능선>의 정환과 황 씨, <붉은 닻>의 동식과 동영은 각자의 상황은 조금씩 다르지만 '결핍'이 있는 인물들이다.
부모에게 버려지거나 가족이 불의의 사고로 죽었거나 가족에게 핍박을 받아 마치 살얼음판을 걷는 듯 인생이 위태위태한 사람들이다.
외상이 컸기 때문일까.
인물들은 한결같이 삶은 살아내고는 있지만 그들의 미래에 희망 따위는 보이진 않는다. 어른으로 성장했지만 마음속 깊숙이 자리 잡은 내면 아이는 그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사회 속에서 고립하게 만든다.
나는 그녀로 인해 내가 잃은 것이
돈과 신뢰만이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나는 삶과 화해하는 법을 잊은 것이었다.
삶이 나에게 등을 돌리자마자
나 역시 미련 없이 뒤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잘 벼린 오기 하나만을 단도처럼
가슴에 보듬은 채,
되려 제 칼날에 속살을 베이며
피 흘리며 있었다.
- <어둠의 사육제> 115p -
가난한 형편이었지만 부모의 도움 없이도 착실하게 일해 4년간 대학 갈 등록금을 알뜰하게 모아 온 영진과, 임신한 아내와 곧 태어날 2세를 기다리며 알콩달콩 행복하게 살아온 평범한 가장 명환은 소설 속 인물 중에 그나마 정신이 온전히 박힌 사람이었다.
적어도 그 사람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행복을 꿈꾸며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인생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피 같은 전세금을 같이 동거하던 인숙 언니가 말도 없이 빼내갔을 때, 교통사고로 임신한 아내를 잃고 자신마저 장애를 갖게 되었을 때, 그들 또한 세상을 향해 환멸과 증오만 남은 사람으로 전락해 버렸다.
마치 누워 있는 동주 오빠 몫까지
살아내려고 하는 것 같아요,
술에 취해 돌아오면 동주 오빠
어깨를 붙들고 일어나라고
고함치곤 하죠,
네 몫까지 살려니 내가 미치겠다……
- <야간열차>, 173p -
사고로 10년 넘게 식물인간으로 누워있는 동생의 몫까지 살기 위해 일분일초를 맹렬하게 싸워나가고 있는 동걸이와, 입대 전 어머니의 별세로 집에 정착하지 못하고 심한 외로움을 느끼는 영현이는 숨 쉴 구멍을 찾고자 언제라도 야간열차에 몸을 실을 생각을 하고 있다.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하지만 할 수만 있다면 그들에게 가서 그렇게 아등바등 살지 않아도 된다고, 떠나고 싶을 땐 언제든 훌훌 떠나라고 말하고 싶다.
20대 중반 어린 나이에 이토록 소설 전반에 '죽음'이라는 먹구름이 끼어있는 건 한강 작가가 일찍이 '죽음'을 직접 목도하고 그것이 내면에 깊이 자리 잡은 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모든 것이 인규에게는
꿈과 같이 느껴졌다.
물먹은 솜 같은 다리가 내딛는 보도블록,
칼칼하게 목구멍으로 감기는 밤공기,
이 모든 것들이 어느 하나
인규에게는 살아 있지 않았다.
달리고 싶다,라고 인규는 생각했다.
그가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은
달릴 때뿐이었다.
- <질주>, 222p -
지금도 매일 아침 독신자 아파트 뒷산 등산로를 열심히 달리고 있을, 온몸이 땀에 젖어도 고꾸라져도 질주를 멈추지 않을 인규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달리다 보면 그 길은 끝날 거라고, 이 싸늘하고 어두운 길은 반드시 끝날 거라고. 그러니 이제 애써 뛰지 않아도 된다고. 진규를 마음에서 그만 보내주라고.
동전에 양면이 있듯이 우리 인생도 어둠이 있으면 밝음이 있는 법이다. 『여수의 사랑』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불행하지만, 어쩌면 이들의 불행은 더 행복하기 위한 과정일지도 모른다. 절망은 극복하라고 있는 것이다. 결핍은 채워나가면 된다.
자, 이제 걸음을 한 발 내디뎌 밝은 세상으로 나아갈 일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