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살 쇼니의 호주 한 달 살기- 멜버른 근교 퍼핑빌리
엄마가 호주에 와서 처음으로 무계획 인간임을 후회하는 순간이었다. 멜버른 근교에 있는 퍼핑빌리기차역을 가려고 알아보니 이 티켓은 한 달 전에 이미 다 마감되었다고 한다. 엄마는 이제 슬슬 가볼까 하고 호주 온 지 일주일이 지나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고, 우리가 호주에 있는 기간 동안 예매할 수 있는 티켓은 이미 하나도 남지 않은 상태였다. 엄마와 같은 사람들은 보통 웃돈을 주고서라도 투어업체를 통해 티켓을 구하곤 하는데 투어업체마저도 티켓이 전혀 없다고 했다. 엄마는 하는 수 없이 포기했다.
그런데 멜버른을 떠나기 하루 전, 새벽 3시에 엄마는 불현듯 눈이 떠졌다고 한다. 그리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퍼핑빌리 공식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았다. 평일이었지만 대륙의 설날에 수요가 많아서인지 주말에만 운행하는 기차가 추가로 운행을 한다고 되어있었다. 그리고 티켓 세 자리가 풀려있었다. 엄마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잽싸게 티켓을 애매했다. 당일예매로 퍼핑빌리를 갈 수 있다니!! 그것도 정가로 구매하다니!! 무계획 엄마가 위너가 되는 순간이었다.
엄마는 서둘러 도시락을 싸고 갈 채비를 해서 나를 깨웠다. 아침 8시 우리는 그렇게 퍼빙빌리로 향했다. 보통은 투어버스를 이용하는데 티켓만 겨우 예매할 수 있었던 우리는 대중교통을 탔다. 하필 기차도 공사 중이라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장장 2시간, 왕복 4시간의 대장정이 시작되었다. 그래도 괜찮다. 일단 티켓을 구했으니까!!
하지만 도착한 퍼핑 빌리는 실망 그 자체였다. 조용하고 한적할 줄 알았던 퍼핑 빌리는 완전한 도떼기시장이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개찰구에 콩나물처럼 빽빽한지 나는 사람들에 치여 꼼짝달싹 할 수 없었다. 모여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중국인 단체 관광객들이었는데 가까이 밀집되어 있는 탓에 중국어로 말하는 소리에 귀가 따가워 귀를 막고 있을 지경이었다.
게다가 사람들은 좋은 자리를 맡으려고 개찰하는데 줄을 서지 않고 막무가내로 선 아래로 들어갔다. 현지 관리자들이 소리를 치고 통솔하려 해도 소용없었다. 정말 대혼돈의 카오스였다. 안 그래도 아침 일찍 일어나서 이곳까지 오느라 피곤한 나는 엄마한테 여기를 당장 벗어나고 싶다고 했다. 엄마도 후회막심한 얼굴이었다.
차례를 지켜 개찰구를 통해 들어간 우리는 당연히 안 좋은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좁은 기차칸에는 25명 정도의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 앉아있었다. 37도의 날씨에 피곤하고 덥고 짜증이 밀려왔다.
엄마는 여기 있는 사람들의 95%가 1시간 후에 내릴 거라고 했다. 우린 다행히 2시간 코스(티켓이 그거뿐이었으므로)로 예매해서 그때는 좀 더 즐길 수 있으니 조금만 참으라고 하셨다.
기분은 별로였지만 일단은 즐기자는 생각으로 나도 다른 아이들처럼 기차칸에 매달려 앉았다. 다들 여기에 매달리기 위해 이 기차를 탄다. 기차는 꼭 토마스와 친구들에 나오는 기차 같았는데 칙칙폭폭 열대우림 같은 숲을 향해 달렸다. 기차가 출발하니 꼭 놀이기구를 탄 것처럼 스릴이 있었다. 나의 기분은 금세 좋아졌다.
검은색 매연이 뿜어져 나오는데 좋은 자리 맡으려고 규칙 어기고 들어간 앞자리 쪽으로만 석탄가스가 가는 것 같았다. 역시 공평하신 하나님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레이크사이드역에 도착하자 정말 단체관광객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복작거렸던 기차 칸에 드디어 평화가 찾아왔다. 열차칸 안에는 중국을 제외한 다양한 국적의 세네 팀 정도만 남아있었다. 그중에는 영화배우를 닮은 혼자 온 잘생긴 외국인 오빠도 있었다. 우리 모두는 이 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깊은숨을 내쉬며 조용히 자연을 즐길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남아있는 우리들에게는 앞에 한 시간을 버텼다는 전우애와 nature australia를 즐기겠다는 모종의 연대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나도 엄마의 아이팟을 꺼내 재미있는 오디오북을 틀고 본격적인 기차여행을 떠날 준비를 했다. 이윽고 열차가 출발하자 아까는 보이지 않았던 동물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깡충깡충 발 밑에서 뛰어다니는 토끼부터 말, 양, 뿔소, 염소와 산책하다 말고 기차를 쫓아오는 강아지들까지 눈앞에 스쳤다. 나는 한산해진 기차에 발을 쭉 뻗고 그림 같은 풍경을 즐겼다. 선선한 바람이 땀과 여행의 피로를 날려주는 것 같았다.
엄마도 창 밖 풍경에 푹 빠져계셨다. 엄마는 이 순간을 기다렸다며 지금을 평생 기억하고 추억하고 싶다고 하셨다.
엄마는 호주에서 워킹홀리데이 하면서 엄마가 도시보다 시골체질이라는 걸 깨달았다고 한다. 할머니, 할아버지 다 서울 출신이지만 엄마는 시골이 좋다고 했다. 엄마가 있던 호주 농장은 180km로 40분을 밟아야 옆집이 나오는 그런 곳이었지만 엄마는 그곳에서 도시에서 일할 때보다 더 평화로웠고 행복했다고 했다.
기차 밖에서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은 우리에게 두 팔 벌려 인사를 해주었다. 그들은 차에 타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가도, 마당에서 잔디를 깎고 있다가도, 강아지와 산책을 하고 있다가도 열차 안 사람들을 향해 웃으며 기분 좋은 인사를 해주었다.
엄마는 큰 소리로 'I love you so much'를 외치며 화답했다. 동네주민들한테 하는 인사인지 잘생긴 외국인 오빠한테 하는 인사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밖을 향해 계속해서 외쳐댔다. 나 역시 기쁜 마음으로 주민들과 동물친구들에게 'Hi'를 외치며 힘껏 두 손을 흔들었다.
기차가 힘껏 종착지를 향해 달려가는 그때 빨간색 예쁜 앵무새가 기차 안으로 들어왔다. 앵무새는 같이 종착지까지 갈 거라는 듯 기차 한편에 자리를 잡고 우리를 쳐다봤다.
그 모습을 본 엄마는 "이런 게 야생이지! 정신없이 기차만 한 시간 타면 뭐 해. 우리 2시간 예매하길 너무 잘했다!"라며 몹시 신나 하셨다. 엄마는 카메라를 꺼내 들고 연신 앵무새 사진을 찍었다.
나는 앵무새한테 내가 먹고 있던 젤리를 나눠주고 싶었다. 그래서 손을 내밀고 앵무새한테 이리 오면 젤리 줄게 이리 와봐라고 이야기했다.
엄마는 내가 가까이 가자 앵무새한테 물릴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고 계속 주의를 주셨다. 아무리 그래도 야생 앵무새고 부리도 뾰족하니 조심하는 게 좋겠다고 하셨다. 손가락 위에 앵무새를 부르고 싶은데 아쉽지만 뒤에서 구경하는 걸로 만족해야 했다. 그런데 앵무새는 나와 엄마를 번갈아보며 고개를 몇 번 갸웃거리더니 갑자기 엄마를 향해 돌진했다.
"악!!!"
퍽 소리가 났고 엄마가 주저앉아 비명을 질렀다. 앵무새는 엄마머리를 쥐어박았다. 그건 내가 엄마한테 대들었을 때 당했던 꿀밤에 5배 되는 강도였다. 10살 인생에서 엄마한테 당한 꿀밤이 5번쯤 되는데 오늘 야생앵무새가 한 번에 엄마한테 되갚아 준 것 같았다. 역시 하나님은 공평하시다.
앵무새가 달려드는 바람에 엄마의 모자가 벗겨졌다. 모자가 아니었으면 아마 엄마는 눈까지 다쳤을 뻔했다고 말씀하셨다. 엄마는 창피함에 한 동안 고개를 떨구더니 이내 주섬 주섬 모자를 썼다. 호주의 대자연을 놔두고 잘생긴 오빠를 배경으로 몰래몰래 셀카를 찍었던 엄마는 그 뒤로는 잘생긴 오빠는 쳐다보지 않고 열심히 바깥 풍경 사진 촬영에 집중했다.
집에 돌아올 때까지 엄마의 이마는 야생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맨날 대자연, 야생 타령하더니 정말 야생의 쓴 맛을 본 참혹 엔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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