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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숀앤펀 Feb 21. 2024

사실은 제가 엄마 데리고 다녀요. 열 번 참으면서.

10살 쇼니의 호주 한 달 살기

 태어나고 10개월 동안 뒤집기도 할 생각이 없이 납작 머리에 늘 누워서 헤헤 거리는 나를 보며 엄마는 늘 기도하듯 말씀하시곤 했다. 언젠가 할 거야 괜찮아. 하지만 엄마는 그러면서도 자꾸 억지로 나를 뒤집혀 놓거나 내가 좋아하는 인형을 먼발치에 놓고 나보고 가져가 보라고 약을 올렸다. 그래도 나는 꿋꿋이 누워있었고 엄마가 억지로라도 엎드려 놓으면 고개를 빳빳이 들고 울거나 앉히면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려 머리를 쿵 박았다. 


 그러다 10개월 차에 겨우 엎어치기(내 기준에서는 그 정도의 기술이었다)를 성공했다. 아빠가 휴가를 내고 아얘 날을 잡고 특훈을 시킨 어느 날이었다. 아빠는 엎어치기 성공한 영상을 회사에 있는 엄마에게 보냈고 엄마는 그날로 퇴근 후에 집에 돌아와 내 발끝을 밀어댔다. 바로 기어 다니라는 것이었다. 이제 겨우 엎어치기 성공한 사람한테 기어 다니라니 어찌나 짜증이 나던지 그럴 때마다 나는 악다구니를 쓰며 울었다. 

'알아서 할 건데 좀 내버려 두라고!!'


나는 속으로 울부짖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는 나를 대학병원에 데리고 갔다. 종합검진에서 무언가가 발견되었는데 잘못하면 걷지도 대소변을 가리지도 못하는 아이로 클 수도 있다고 하셨다. 대학병원에서 추가 검사를 받아보라는 소견서를 써주었다. 이 날은 엄마도 같이 울부짖었다.

 다행히 의사 선생님께서는 별다른 이상은 없어 보이니 크면서 지켜보자고 하셨다. 이후 엄마는 나를 늘 불안의 눈으로 쳐다봤다. 난 그런 엄마에게 보란 듯이 돌을 3일 앞두고 일어서고 걷기를 한 번에 끝냈다. 

  '거봐! 알아서 한다니까.'

수도 없이 옹알이로 때론 울면서 말했는데 엄마는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조바심을 냈다. 하지만 결국 해내는 나를 보고 엄마는 안도하고 때 되면 다 할 거라는 믿음으로 나를 다시 지켜봐 주었다.  


그러던 엄마에게 스멀스멀 욕심이 올라오기 시작한 건 내가 4살 때였다. 어느 날인가 나는 어린이집에 붙어있는 이름표들을 보고 한글을 끄적끄적 따라 적기 시작했다. 이걸 보신 담임 선생님이 놀라며 엄마에게 연락을 하셨다. 선생님께서는 집에서 가르치셨냐고 물으셨는데 엄마는 "우리 딸이요? 그럴 리가요"하고 내게 색종이에 글씨를 써보라고 했다. 나는 주저 없이 엄마 아빠 이름과 내 이름을 썼다. 인스타도 잘 안 하는 엄마는 깜짝 놀라 당장 그 영상을 인스타에 올렸고 그 뒤로 천재 영재 등등 놀라운 댓글들이 수두룩 달렸다. 

 다른 아이들보다 항상 느려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기다려주던 엄마가 변한 건 그때부터였다. 말로는 때 되면, 혹은 괜찮다고 말해도 엄마는 내가 조금 더 잘하기를 바랐고 그렇다고 믿고 싶어 했다. 


 반면에 나는 용감한 척 하지만 사실은 겁이 많은 아이였다. 처음 보는 모든 것이 다 어렵고 조심스러웠다. 그래서 무언가를 하려면 남들보다 열 번은 더 시도를 해야 해서 성공할 수 있었다. 뒤집는 것도, 걷는 것도, 먹는 것도 난 늘 조심스러웠고 도전이었지만 자존심은 세서 포기하거나 못하는 척 따위는 하고 싶지 않은 이상한 똥고집도 있었다. 


 바닷가 가면 발에 모래가 닿는 느낌이 싫어 어떻게든 아빠에게 매달려있었다. 아빠는 날 억지로라도 모래사장에 떨어뜨려 놓으려고 했지만 거목에 붙은 매미처럼 난 한사코 버텼다. 실랑이 끝에 처음 1시간, 2시간 3시간쯤 돼서야 나는 겨우 발을 내려놓고 모래 위를 거닐었고 그제야 놀기 시작했다. 밑에 뭐가 있는지 잘 보이지도 않는 바닷가에서 나 스스로 물에 들어가는 일 따위는 더더군다나 하지 않았다. 

 이런 나를 엄마 아빠는 부지런히 주말마다 밖으로 데리고 다니셨다. 엄마는 저렇게 살면 본인이 힘들 텐데 걱정이라며 나의 예민함이 둥글어질 때까지 좁은 차에 캠핑짐을 가득 싣고 서울에서 충청도로, 강원도로, 제주도까지 배를 타고 차를 끌고 여기저기 자연으로 데려가 나를 던져 놓았다. 그렇게 수 없이 새로운 상황에서 도전하고 놀면서 나는 이제 모래 정도는 기꺼이 밟고 뛰놀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런데 이곳 호주에 오니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었다. 겨우 적응했던 한국에서의 환경은 사라져 버렸다. 먹는 것도, 노는 것도, 말하는 것도 내겐 도전이고 다 미션이었다. 

 박물관이나 아쿠아리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곳엔 동굴 같은 곳에 들어가 머리를 위로 쏙 내밀어서 체험하는 곳이 있었다. 나는 사실 무서워서 하기 싫었다. 물론 벽이 있다는 것도 알고 물고기들이 나를 해치지 않는다는 건 너무나 잘 알지만 좁은 통로에 들어가는 것도, 거기에 머리를 내밀고 커다란 꽃게와 눈 마주치는 것도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래서 멀리서 구경만 하는데 엄마는 자꾸 '이게 얼마짜린데'라며 사진 찍어야 한다고 나를 안으로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곳엔 나보다 훨씬 어린 아기와 동생들이 머리를 집어 놓고 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무서워서 몇 번 가는 시늉만 하고 돌아왔더니 엄마가 버럭 화를 냈다. 

 "괜찮다니까! 저기 동생들도 하는데 뭐가 무섭다고 그래 좀! 진짜 별거 아니라니까. 한번 들어가 봐!"

나도 사실 재밌게 즐기고 싶었다. 하지만 무서운 걸 어쩌랴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난 이미 몇 번이나 해보려고 도전해 봤지만 못 하겠어서 돌아왔다. 갑자기 서러워서 눈물이 났다.

내가 울먹거리자 엄마는 '누굴 닮아 저리 겁이 많고 예민할까' 하며 한숨을 쉬었다. 갑자기 썰매장 가서 나보다 더 크게 소리 지르고 야단을 피우며 썰매를 탔던 아빠가 생각났다. 아빠는 지금도 우리가 없는 집이 무서워 모든 방에 불을 다 켜고 주무신단다. 나는 아빠가 보고 싶어 졌다. 

 엄마가 '무서우면 안 해도 돼. 괜찮아'라고 손이라도 잡아주면 얼마나 좋을까. 화내는 엄마가 원망스러웠다. 

"엄마 내 엄마 맞아?" 

속상한 나 역시 날카롭게 엄마에게 대들었다. 엄마의 눈에서 불꽃이 튀더니 이내 나를 두고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눈물을 닦으며 엄마를 터덜터덜 쫓아갔다.  


냉랭한 상태로 우리는 기분을 풀기 위해 내가 좋아하는 놀이터로 갔다. 시드니 텀바롱 공원 놀이터는 정말 내가 본 놀이터 중에 최고로 재미있는 곳이다. 높은 정글짐과 집라인, 과학으로 설계된 물놀이터까지 정말 어린이들을 위한 천국이 따로 없다. 그런데 이곳에는 내가 도전해야 할 것이 참 많았다. 그중에서도 높이 있는 정글짐이 나는 무서웠다. 꼭대기에 올라가고 싶은데 자꾸 아래만 보게 되고 올라갈 수 없는 이유들만 생겨났다. 나는 덥다거나 엉덩이가 아프다거나 친구들이 있어 비켜줘야 한다는 이유로 계속 내려왔다. 

 오늘은 꼭 나도 정글짐 고지를 밟겠다고 다짐하고 간 놀이터였다. 아직 여섯 번 밖에 도전하지 못했고 여전히 한 두 칸 밖에 못 올라갔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잘할 수 있으면서 왜 자꾸 내려와~ 거기서 버텨봐. 아래 보지 말고 엄마보지 말고 위를 봐. 위! 자꾸 아래를 보니까 무섭지"

 엄마는 할 수 있다며 나를 다그치기 시작했다.  난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는데 난 다시 뒤집기를 하기 전으로 돌아간 기분이었고 짜증이 났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나를 보고 엄마는 시간이 늦었으니 그냥 가자고 하셨다. 난 오늘 꼭 성공하고 싶었다. 하지만 가뜩이나 기분도 안 좋은데 괜히 엄마랑 싸워봤자 좋을 게 없었기에 포기하고 정글짐에서 내려왔다. 이번에도 기다려주지 못하는 엄마에게 서운함이 몰려왔다. 

 그런데 가자고 하던 엄마가 내 얼굴을 보더니 갑자기 울컥하더니 미안하다고 했다. 엄마 눈가엔 눈물이 촉촉했다. 어떤 영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를 안으려고 하는 엄마에게 더우니 저리 가라고 했다. 나의 이마와 콧잔등에는 땀이 비 오듯이 쏟아지고 있었다. 해 질 녘 날은 선선했고 놀이터에서 정글짐만 탄지 20분 정도 지났을 때였다. 

 엄마는 땀으로 범벅이 된 나의 콧잔등과 이마의 땀을 연신 닦아주며 말씀하셨다. 

 "정말 많이 노력했는데 엄마가 몰라줬네 미안해. 꼭대기까지 안 가면 어때, 저기 한 칸만 더 해보자. 엄마도 같이 올라가서 도와줄게"

나는 의심쩍은 얼굴로 진짜냐고 물었고 엄마는 그렇다고 했다. 하지만 엄마의 도움 없이 성공하고 싶었던 나는 혼자 한 칸 한 칸 다시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반복하고 결국 꼭대기는 아니지만 목표한 지점까지 올라가는 데 성공했다. 엄마는 내가 일주일만 그곳에 더 있었어도 무조건 꼭대기까지 성공했을 거라고 말씀하셨다. 내 생각도 그렇다.


 엄마는 오늘 화낸 것들의 미안함이 쓰나미로 몰려온 눈치였다. 밖에서까지 나와서 화내고 다그치다니 영 못난 엄마라고 계속 자책하며 엄마가 오늘 좀 힘이 들었나 보다고 사과했다. 난 이번에는 10번의 고민 없이 바로 엄마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난 기분이 풀렸는데도 어째 엄마는 더 슬퍼 보였다. 가뜩이나 예민한 나를 맞추느라 늘 옷이며 먹을 거며 가방 한 짐 들고 다니는 엄마의 어깨가 더욱 무거워 보였다.  

 숙소로 돌아와 나는 엄마의 어깨를 주물러 드렸다. 엄마는 아무리 기분이 안 좋아도 마사지만 해주면 기분이 싹 풀리는 것이 생각났다. 그리고 엄마께 오늘은 수영장에 가지 않고 누워서 도란도란 이야기나 하다 자자고 했다. 엄마는 한 동안 말씀이 없으시더니 내 머리만 연신 쓰다듬었다. 우리는 밤늦도록 이런저런 여행이야기들로 한참이나 수다를 떨고 깔깔거리다 잠이 들었다. 


오늘은 내가 호주 와서 수영장에 안 간 유일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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