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살 쇼니의 호주 한 달 살기(골드코스트 서퍼스파라다이스)
바다다. 보기만 해도 속이 뻥 뚫리는 바다. 이쪽을 봐도 저쪽을 봐도 온통 바다인 이곳은 골드코스트다.
엄마는 바다가 보이는 골드코스트에서 만큼은 원베드룸이 별도로 있는 숙소를 잡았다. 기존까지는 원룸형태의 스튜디오 숙소라 내가 자면 같이 불을 끄고 누워있어야 했던 엄마가 나를 재우고 본격적으로 딴짓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게다가 이곳은 엄마가 좋아하는 베란다가 있다. 엄마는 베란다에서 새벽에는 커피를 마시고 밤에는 와인을 마시며 책을 읽거나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곤 한다. 베란다 통창 너머로 하얗게 파도가 부서진다.
아마 세상에 물멍 때리기 대회가 있다면 우리 엄마가 당연 1등 할 것이다. 엄마는 강원도를 가도 하와이를 가서도 그리고 이곳 골드코스트에서도 그저 바다만 하염없이 바라본다. 몇 시간이 흘러도 컴컴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더라도 그저 바라만 본다.
"엄마, 대체 바다 보면서 뭐 해?"
한시라도 가만히 있기 어려운 난 엄마가 바다만 쳐다보고 있는 게 여간 신기하고 이상한 게 아니다.
엄마는 바다를 바라보며 이 생각, 저 생각들을 한다고 했다. 평소에 꽁꽁 묶여있던 엄마의 생각들은 바다만 오면 태평양처럼 풀어져서 다시 모으기가 힘든 건지 도대체 한번 앉아있으면 일어나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가야 하는 시간이 다가올수록 엄마가 바다를 바라보는 시간도 하염없이 길어졌다.
서퍼스파라다이스 비치는 이름처럼 파도가 많이 쳐 서퍼들의 천국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이곳에서 나는 구명조끼를 사려고 찾아봤는데 서핑보드만 있고 구명조끼 파는 곳이 없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한국에서 가져간 튜브에 바람을 넣어서 놀려고 했더니 이번에는 바람 넣는 곳이 없다고 했다.
호텔, 편의점 등등 어디서 물어봐도 마찬가지였다. 입으로 직접 부는 수밖에 없다는 말에 엄마는 모래사장에 앉아 튜브를 훅훅 불기 시작했다. 30도가 넘는 무더위에 파도 끝 언저리에서 발만 담근 채 엄마는 장장 2시간 동안 땀을 뻘뻘 흘리며 튜브에 바람을 넣었다.
"우와, 이게 되네? 진짜 대박"
난 정말 아무리 훅훅 대도 미동 없는 튜브에 엄마가 물놀이하기 싫어 일부러 부는 시늉만 한다고 생각했다. 나도 불려고 해 봤지만 꿈쩍도 하지 않던 튜브였다. 그런데 그 튜브가 이젠 갓 구운 도넛처럼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뒤에 앉아있던 노부부가 엄마에게 박수를 쳐주었다. 엄마는 비록 동공은 풀리고 두 번의 헛구역질에 침은 질질 흘리고 있었지만 나는 아직 괜찮다는 듯 노부부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런데 막상 튜브타고 놀려고 보니 물결이 세 자칫 파도에 휩쓸려 갈 것 같았다. 어쩐지 아무도 튜브 같은 거 타는 사람이 없더라니.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한 나는 열심히 불은 튜브는 땅에 박아놓고 엄마만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작년 여름이었다. 새벽 댓바람부터 바다가 보고 싶다고 아빠를 들들 볶던 엄마의 성화에 못 이겨 우리는 갑작스레 삼척으로 떠났다. 밤 사이 삼척에 거센 비바람이 지나간 지도 몰랐고, 물놀이할 생각도 없이 그저 눈떠서 향한 바다였다. 그런데 바다만 보고 오려던 우리의 계획은 삼척의 파란 바다를 보니 그럴 수 없었다. 나는 물에 첨벙 뛰어들었다. 전날 날씨가 안 좋았어서 물놀이 용품을 파는 곳도 없고, 준비해 간 여벌옷도 없었지만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깨끗한 삼척바다를 그저 바라만 볼 순 없었다.
하지만 준비 없는 물놀이의 결과는 엄마의 깁스와 나의 입원이었다. 엄마는 내게 인간튜브를 해주겠다고 하다가 목을 삐끗했고, 나는 열심히 수건으로 몸을 닦았지만 결국 지독한 감기에 걸려 주사를 맞아야 했다. 그 이후로 엄마는 내게 인간튜브 따윈 해주지 않겠다고 다짐했더랬다.
서퍼스파라다이스 비치는 무릎높이에도 세차게 파도가 몰아쳤다. 나는 물놀이하겠다고 2시간을 모래놀이와 발만 담그며 튜브만 기다렸다. 여전히 태양은 뜨거웠고 엄마는 튜브를 부느라 이미 기진맥진해 있었다.
엄마만 애타게 쳐다보는 나를 보며 엄마는 몇 번 심호흡을 하더니 큰 결심을 한 듯 내게 말씀하셨다.
"매달려"
신이 난 나는 아싸라비야 콜롬비야를 외치며 엄마에게 매달렸다. 이번에는 엄마 목이 삐지 않도록 팔과 어깨를 꽉 안았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꼭 엄마한테 안겨있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덥고 끈적거렸지만 엄마를 안으니 내 안에서 사랑이 솟구쳐올라 엄마의 볼에 뽀뽀를 해드렸다. 물론 이제 믿을 건 엄마 몸뚱이뿐이니 일단 살기 위한 나의 애교전략이기도 했다.
"자, 간다!!!"
엄마는 늘 바라만 보던 거친 파도를 향해 나를 안고 그대로 뛰어갔다. 얕은 파도지만 어찌 물살이 센지 앞으로 가는데도 자꾸 뒤로 밀려 나왔다. 우리는 파도를 껑충 뛰기도 하고 두둥실 파도 미끄럼틀을 타며 safe zone에서 2시간을 신나게 놀았다. 도넛 튜브를 타고 둥둥 떠 나니는 것 보다 훨씬 더 재밌었다.
엄마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을 때 보다 직접 파도에 부딪히며 놀았던 시간이 훨씬 더 즐거웠다고 했다. 막상 바다에 들어가니 생각의 조각이고 뭐고 그저 그 순간 살아야 한다는 것 말고는 다른 걸 떠올릴 틈도 없었겠지만 말이다.
서퍼스파라다이스 비치에서 놀고 난 뒤로 엄마는 더 이상 베란다에 나가지도 바다를 보며 물멍 하지도 않으신다. 왜냐하면 몸져누웠기 때문이다. 엄마는 어깨부터 발가락까지 어느 하나 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며 골프 연습 한 10시간은 한 것 같은 느낌의 몸살강도라고 했다.
난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나는 엄마가 바다 보며 쓸데없는 생각 따위 하지 말고 그냥 잠이나 편하게 잘 주무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오늘은 어디 나가지 말고 숙소에서 푹 쉬자고 했다. 호주 와서 하루 만보 이상 안 걸은 날이 없고 매일 수영장에서 물놀이를 했던 엄마가 드디어 아무것도 하지 말자고 하셨다. 이 말인 즉 나는 하루종일 게임이나 넷플릭스를 볼 수 있단 뜻이다. 서퍼스파라다이스는 서퍼들에게만 천국이 아니었다. 내게도 천국 같은 시간이 드디어 호주에 와서 허락됐다. 할렐루야!
나는 끙끙대는 엄마 여기저기를 주물러 드렸다. 그리고 제발 부디 오늘은 엄마도 푹 쉬시라고 말씀드렸다. 엄마는 알겠다는듯 눈을 감았다. 창문 너머에 드넓은 바다가 펼쳐져 있지만 바다엔 눈길도 주지 않고 그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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