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살 쇼니의 호주 한 달 살기(브리즈번 퀸즐랜드 아트센터-사우스뱅크파크
오늘 우리는 미녀와 야수 뮤지컬을 보러 갔다. 시드니에 있을 때부터 보고 싶었지만 시간이 안 맞아 포기하고 있었는데 마침 브리즈번 일정과 딱 맞아떨어져 예약하게 되었다.
공연장에 도착하니 벌써 공주옷을 입은 예쁜 여자친구들이 여럿 보였다. 머리에는 커다란 리본끈을 한 금발머리 소녀부터 단체로 드레스를 맞춰 입은 친구들까지 나는 이미 동화 속 한 페이지로 초대된 것 같았다. 반면 유리창 너머 비친 내 모습은 초라해 보였다. 늘 같은 옷에 그 마저도 매일 빨았더니 목이 해저 있었다.
“엄마, 우린 호주 온 지 한 달이 다되어가는데 왜 맨날 밤새고 공항에 방금 도착한 사람들처럼 꾀죄죄해?”
엄마는 그게 무슨 소리냐며 펄쩍 뛰시며 애꿎은 내 머리끈을 고쳐 매 주었지만 사실이었다. 우리는 여행할수록 꼬질꼬질해져 갔다. 엄마는 통장에 잔고를 보며 점점 더 아꼈고, 여러 도시를 이동하기 위해 짐은 최소화했다. 우리에게 먹을 거 외에 쇼핑은 사치였다. 다행히 엄마는 먹는 거에는 안 아끼니까 그럼 우리는 먹는 걸로 기분을 내보자고 팝콘과 음료수, 와인을 주문했다. 호주에서는 뮤지컬을 보면서 팝콘을 먹을 수 있다!!!
엄마는 공연 보면서 와인 마시는걸 꼭 한번 해보고 싶다며 신나게 와인을 마시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팝콘에 비하면 짜기만 하고 양도 적지만 나도 맛있게 팝콘을 뜯기 시작했다. 한국의 캐러멜팝콘이 그리웠다.
이윽고 무대가 시작됐다. 화려한 조명과 움직이는 사물 친구들이 마치 앨리스의 나라를 떠올리기 했다.
어느 날 미녀는 아빠 대신에 야수의 성에 갇혀버렸다. 그런데 야수는 사람을 그리워했다. 정확히는 자기를 마법에서 풀려나게 해 줄 여자를. 이왕이면 미녀를 기다렸다.
하지만 미녀의 상황은 달랐다. 미녀는 결혼을 약속한 사람도 있었고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런데 노래를 몇 번 부르고 막이 몇 번 바뀌더니 그 둘은 갑자기 사랑에 빠졌다. 응? 그럴 수 있다고? 게다가 야수는 매너란 게 없었다. 음식도 손으로 먹고 날고기를 먹는 말 그대로 야수.
야수는 미녀를 가둬놓고 미안한 마음에 미녀가 평생 읽을만한 책들을 선물했다. 그리고 억지로 저녁식사에 참여하게 했다. 밥 먹기 싫은데 억지로 먹어야 한다니 나는 너무 싫을 것 같은데 미녀는 점점 야수에게 마음을 열었다. 그리고 그 둘은 결국 사랑에 빠졌고 야수는 마법이 풀려 멋진 왕자가 되었다.
말도 안 돼. 난 미녀가 너무 착한데 야수의 사정을 알고 불쌍해서 잘해줬을 거라고 생각했다. 왕자로 바뀌든 안 바뀌든 눈앞에서 외로워하고 있는 야수를 못 본척하기 힘들었을 테지. 얼굴도 마음도 예쁜 미녀니까.
난 미녀의 행동들이 그저 놀랍고 대단하다고 느껴져 엄마에게 나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엄마가 더 놀라웠다. 엄마는 불꽃이 번쩍거리고 노래의 열기로 터질 것 같은 공연장에서 평온하게 주무시고 계셨다. 엄마는 공연 시작 전부터 신나게 와인을 마시더니 이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여기가 미녀와 야수의 뮤지컬인지 잠자는 숲 속의 미녀 뮤지컬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엄마는 꿈쩍하지 않았다.
“엄마, 이럴 거면 비싼 돈 주고 여기 왜 왔어 일어나!! “
공연은 앞자리에서 봐야 된다더니 이러려고 그랬냐며 엄마를 흔들어 깨웠다. 하지만 엄마는 깨울 때만 잠시 정신을 차릴 뿐 음냐음냐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집중해서 공연을 즐기는 사람들 사이에서 퍼질러 자고 있는 엄마가 창피했다.
‘야수님, 여기 잠자는 우리 엄마도 가둬주면 안 될까요?’
공연은 티팟 아줌마와 서랍 아줌마, 촛불아저씨 등등 조연친구들의 활약 덕분에 재밌었다. 영어를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배우들의 표정과 행동으로 그들의 감정을 느끼고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미녀와 야수사이에도 말로는 표현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사랑이란 게 있었겠지? 지금 옆에서 쿨쿨 자고 있는 엄마가 가끔 내게 화를 내고 혼을 내도 날 사랑한다는 걸 느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공연이 끝나고 사우스뱅크 공원을 산책했다. 바닥은 비가 왔는지 젖어 있었고 공기는 시원했다. 엄마는 원래 뮤지컬은 런던이 진짜라며 다음에는 같이 런던에서 뮤지컬을 보자고 하셨다.
"런던에서 자는 거 아니고?"
대답을 한다는 게 나도 모르게 엄마에게 쏘아붙였다. 해 질 녘 노을이 얼큰한 엄마의 얼굴을 가려주려는 듯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