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딸만 셋 있는 집에서 엄마는 막내로 태어났다. 남아 선호사상이 팽배했던 시절이라 외할아버지는 이번에도 딸인 엄마를 탐탁지 않아 했다. 돌 무렵 엄마(외할머니)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홀아비 딸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인생을 시작했다. 요즘엔 편부가 흠도 아니지만. 그 시절에는 엄마가 없는 것도 죄가 되었나 보다. 홀아비의 딸이라는 놀림을 많이도 받았단다. 그렇게 홀로 된 아비와 위로 언니 셋이 엄마에겐 가족의 전부였다. 외할아버지는 못내 미련을 못 버리고 양자를 들이기도 했지만 내 기억 속 외삼촌은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엄마는 유난히 자매들과 사이가 좋았다. 근동에 살았던 이모들은 장날이면, 특별한 날이 아니어도 자주 집에 왔었다. 당신들의 손으로 키우다시피 한 막내가 유난히 애틋했으리라. 거북선이 그려져 있는 10원짜리를 내 손에 쥐어 주시곤 하셨는데 그것 때문에 이모가 기다려지기도 했다.
살뜰히 챙겨주는 친정엄마가 없어서였을까. 형제 많은 종갓집종부가 되어 평생을 가난과 시집살이에 부대끼며 살았다. 시집올 당시에는 비록 일복 많은 종부이기는 하나 논밭떼기 정도는 넉넉히 되는 집안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앞가림 못하는 형제는 있기 마련이다. 삼촌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노름과 도박으로 소위 집안 편할 날이 없었다. 형과 형수 모르게 토지문서를 들고나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어서 가세도 기울었다. 어린 기억에도 삼촌과 아버지가 다투던 모습이 셀 수 없이 많다. 한 번은 예닐곱 먹은 내 키의 두 배정도나 되는 쌀독 안에 감추어둔 논문서를 들고나간 작은아버지(당시엔 삼촌이 결혼하여 작은아버지라 불렀다.)때문에 집안이 발칵 뒤집어진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작은아버지를 "호로자식~"이라 불렀고, 할머니는 애꿎은 큰며느리만 잡았다. 보다 못한 작은어머니가 작은아버지 배위로 올라가 목을 조르며 "네가 사람새끼냐. 너 죽고 나도 죽자"했다. 그 장면은 어린 내게 너무 충격적이어서 지금도 작은어머니가 무서워서 피한다. 정말 그런 난리가 없었다. 종부라는 책임으로 철도 없고, 속도 없는 시누 둘에 생활력 없는 시동생 둘을 모두 당신 손으로 시집장가를 보내고도 한 지붕아래 데리고 살았으니 그 고단함이 오죽했을까. 고모들은 결혼해서 두 집 건너에 살았다. 한집살이나 다름없었다. 툭하면 달려와 엄마의 오장육부를 뒤집어놓는 일이 다반사였다. 시어머니(우리 할머니)의 시집살이는 또 어떻고. 동네에서도 이미 유명인사일만큼 고약한 노인네였으니, 아무리 시절 탓을 하려 해도 제정신으로 살기 힘든 지난하고 외로운 삶이었다.
울타리가 되어주어야 할 남편(아버지)은 결혼당시 갓시집온 어린 색시를 병약한 시아버지와 성질이 불같은 시어머니, 어리디 어린 열댓 살 시누. 시동생이 즐비한 지옥불에 던져놓고 서울에서 잠시 경찰이라는 직업을 가졌었다. 6년이라는 짧은 경찰 생활 덕분에 돌아가실 때 국가유공자묘지에 안장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지만 종손이라는 이유로 선산에 모셔지긴 했다. 아버지가 경찰생활을 접은 내막은 모르나 귀향하여 농사꾼이 되었고, 엄마의 삶이 제대로 꼬여버린 건 그때부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