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적인 공황장애 초기 극복 방법
요즘 나의 쉬는 날 일상은 이렇다. 아내가 일하러 가는 길을 동행한다. 근처 카페로 가서 노트북 작업을 하다가 마트에서 장을 보고 같이 집으로 돌아온다.
집으로 오는 길 차 안에서 아내는 이야기를 한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었고, 내가 안 한 말이 뭐가 있었지? 라며 언제나처럼 신나고 밝은 목소리로,
돌아오는 길 20분 내내 봄이 반가워 우는 새들처럼 즐겁게 지저귄다.
아내는 아직도 공황장애를 가지고 있다. 지난 4년 동안 많은 노력 끝에 공황장애를 두려워하는 마음은 거의 사라졌다. 그렇다면 공황장애 초기에 아내는 어떻게 극복하기 시작했을까?
공황장애를 치료하기 위해서 아내는 꼭 짧게나마 외출을 했는데 당시의 본인 모습을 이렇게 회상했다.
(이 말을 듣고 내가 공황에 걸리는 줄 알았다)
마치 전쟁 중에 민간인이 두려움에 떨며 외출하는 것 마냥 집 밖을 나섰다고. 피를 철철 흘리면서, 총알을 온몸으로 받아내면서 힘겹게 한 발, 한 발 겨우 기어가며 발을 내디뎠다고.
이런 무서움을 딛고 아내는 당시 불안에 취약했던 상황을 바꾸려고 노력했다. 그녀의 노력은 크게 2가지로 나뉠 수 있는데,
첫째, 소속감을 가질 수 있는 커뮤니티 만들기
둘째, 최대한 빨리 병원에 가서 치료받기
아내는 공황장애를 겪었을 때의 느낌을 마치 "붕 뜬 느낌"이라고 했다. 어딘가에 소속되지 못하고 외로움을 느끼면서 계속 불안한 상태, 누군가 날 케어해 주는 사람도 없고 날 알아봐 주는 사람도 없는 그런 상태라 일컫었다. 마치 잠에서 깼는데 홀로 무인도에 떨어진듯한 느낌인 걸까?
10년 넘게 한 회사를 다니고 있는 나는 일상에서 크게 소속감을 느끼거나 외로움을 느끼거나 불안해하지 않는다. 회사라는 적이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린다면 나도 아내처럼 상실감을 느끼지 않을까? 마치 우리네 아버지들이 퇴직 후에 흔히 겪는다는 그 우울증처럼.
아내는 소속감을 가질 수 있는 커뮤니티로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는 교회를 선택했다. 20대 초반에 서울역 부근 대형교회에서 열심히 커뮤니티 활동을 하면서 좋은 추억을 만들었다. 타지에서 대학 생활을 하면서 느꼈던 외로움과 힘듦을 주변 사람들로부터 위로를 받았다. 다른 사람들과 교류를 하고 활동하면서 느끼는 소속감과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심 없이 잘 지냈었다.
그래서 아내는 공황장애를 겪자마자 사촌동생이 다녔었던 교회에 가서 교인 등록을 하고 목사님과 상담을 했다. 1주일 뒤 우리 가족 담당으로 배정된 목사님에게 연락이 왔고 같이 식사를 했다. 공릉역에 위치한 쌀국숫집이었는데 나의 기억은 그 집 해물쌀국수가 한국적인 맛이어서 특이하고 괜찮았었지밖에 없는데 아내는 그날도 공황으로 힘들었고 '필요시약'을 먹으면서 겨우 그 시간을 버텼다고 회상했다. 그즈음이 공황이 정말 심했던 때라서 이런 일상이 아내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를 줬었다. 보통 사람들도 낯선 환경에 가면 불편하고 불안할 텐데, 더군다나 아내는 그런 예민함이 보통 사람보다 더 날카로웠다.
공황장애 발병 후 바로 동네 정신건강의학과를 검색했다. 블로그와 카페의 댓글, 대댓글까지 모두 확인한 후에 한 곳을 정하고 연락을 했다. 정말 시급한 상황인데도 3주나 대기를 해야 했었다. 정말 길었던 3주 동안 다행히 아내는 큰 발병이 없었고 의사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다. 병원을 정기적으로 다니면서 상담을 받고 약도 잘 챙겨 먹으며 아내는 공황장애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불안, 두려움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감정의 정도가 약해졌고 빈도도 줄어들었다.
정작 코로나가 심해지면서 교회를 방문하기보다 온라인으로 많이 참석했지만 아내의 노력, 어떻게든 공황에 처해진 본인의 환경을 바꾸기 위한 노력, 으로 공황장애 초기 어려웠던 시절을 잘 버텨냈었다.
요즘 들어 옛 말에 대한 존경심이 생긴다. '티끌 모아 태산' 같은 흔한 말에서 큰 감동이 느껴진다. 그 작은 티끌 하나하나가 아내의 힘겨운 한발한발과 오버랩되어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