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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조음 Mar 19. 2024

큰 스님과 과자 한 봉지

엊그제 큰스님께서 황급히 매점으로 들어오셨다. 간식용으로 판매하는 과자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오시기에 얼른

“신도님, 손주분들 오셨나 봐요?” 하고 여쭈었더니,

 “으응~신도가 찾아온 게 아니구, 저기 김보살이 점심도 안 먹고 앉아 있어서 이거라도 가져다주려고….”
   그래서 재차

 “아, 그러면 이 과자보다 공양을 먼저 해야지요?”하고 물으니

 큰스님께서는 난감하신 듯,

 “아니, 그게 아니구~ 난 김보살도 좋고, 박보살도 참 좋은데, 요즘 두 보살 사이가 조금 소원한 모양이야.  모두 다 열심히 일하고 평판도 좋아서 우리 절에 없으면 안 되는 사람들이거든. 내가 아주 좋아하는 보살들인데, 둘 사이가 그래서 난감하구만. 밥 때가 한참 지났는데도 밥도 안 먹고 지금 저기 앉아 있어서 이 과자라도 주면서 달래주려고 그래.”

 큰스님께서는 혹시라도 김 보살이 자리를 뜰까봐 처음 들어오시던 바쁜 걸음걸이로 과자 봉지를 움켜쥐고 매점에서 나가셨다.


 김 보살이 큰스님께서 건네주시는 과자 한 봉지를 받으며,

 ‘뭘 이런 과자를 다 가져 오시고…’ 하면서 고맙게 받아서 맛있게 드셨는지, 아니면 ‘세상에나~ 내 어지러운 마음을 어찌 아시고 일부러 이런 걸 다 사오셨구나.‘ 하시며 겸연쩍어 하셨는지‘.. 알 길은 없지만 큰스님께서 들고 가신 과자를 보면서 어릴 적 나의 모습이 생각났다.



 하루가 멀다 하고 언니랑 투닥투닥 싸우고 나서는 입이 오리주둥이 만큼이나 댓 발 나와 있으면 엄마는,

 “이놈의 가시나는 왜 맨날 언니한테 바락바락 대들어서 집안 시끄럽게 하고 그러는 거야?”

하시며 제 역성을 들기는커녕 등짝까지 얻어맞기 일쑤였다. 믿었던 엄마에게까지 얻어맞은 서러움에 장독대 뒤에 숨어서 훌쩍거리면 꼬부랑 할머니가 용케도 찾아와서는

 “아가~ 울 막내 아가~ ~누가 이, 이쁜 울 애기를 울리노? 떽끼! 내가 니 에미랑 니 언니 가시나 혼꾸녕을 내 줄꾸마. 긍께 뚝 그치그라. 울 강아지 울지 말그래이~.”


 할머니께서는 한 손으로는 내 눈물을 닦아 주시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몽당치마 골말이를 뒤적거리며 속주머니에 꽁꽁 숨겨 두신 눈깔사탕을 내 입에 물려주시며 무슨 큰 비밀이라도 되는 양, 목소리를 낮추시고

 “이거, 암도 주지 말고 울 애기 혼자만 얼릉 먹그래이~ 언니 가시나 보기 전에 후딱 먹어야 한대이~ 언니 가시나 알면 할마시가 울 막내만 이뻐한다고 울고불고 야단일텅게. 얼릉 일어 나그라~알 것제.”


 눈물 콧물 범벅인 눈깔사탕. 그 달디단 맛에 등짝 맞은 설움도 다 잊어버리고 언제 울었냐는 듯, 할머니가 나만 이쁘다고 몰래 내어 주신 눈깔사탕을 헤헤거리며 볼타구니가 미어지도록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며 의기양양하게 마당으로 들어서면


 ‘?? 어라, 저 여시 같은 언니 가시나도 볼이 터지게 사탕을 굴리고 있네?’


 이미 김 보살, 박 보살, 모두  허옇게 서리가 내리고 장성한 손주들까지 두고 있어서 이깟 과자 한 봉다리로 두 분의 마음이  금새 풀어질는지 어떨지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그 옛날 사탕 한 알로 어린 내 마음을 녹여주셨던 내 할머니. 그 따스한 마음과 큰스님의 마음을 어찌 감히 비교할까마는, 큰 스님께서도 내 할머니가 그러하셨듯이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고 과자 한 봉지를 내밀어 두 보살의 응어리진 마음을 녹여주려 하셨던 것이다.


 그냥 두 보살들끼리 알아서 풀어지든 말든, 싸우다가 토라져서 절을 나가든 말든 못 본 척 할 수도 있으련만 김 보살에게는 ‘자기가 조금 잘못했다고 하더라~' 하시고, 또 박 보살에게는 김 보살이 그러는데 '박 보살이 참 좋은 보살이라고 칭찬하더라~.' 양쪽을 바삐 오가며 어르고 달랬을 것이 분명했다.


 큰스님의 이러한 모습을 바라보면서

 ‘두 보살님은 참으로 복이 많으신 분들이구나. 스님 앞에 ‘대大’자가 괜히 붙는 게 아니었구나. 어른은, 큰大, 어른은 응당 이러한 ‘큰마음’, 대덕大德의 마음을 갖추고 계시는구나. 이렇게 대덕大德의 위의를 갖추신 큰 스님이 우리들 앞에 너무나 소박한 모습으로 앉아 계시는구나.‘ 하고 생각하니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몇 천원이면 살 수 있는 하찮은 과자 한 봉지에도 스님의 큰 마음이 담겨 있음을 새삼 알게 되었다.


  이제 눈깔사탕으로 어린 마음을 달래주시던 할머니도 아니 계시고, 내 등짝을 후려치시던 어머니도 아니 계신 지 오래이다. 지금 살아 계시다면 그동안 못다 한 효도를 백번이고 천 번 이고 다 하련만 떠나버린 지 오래여서 영영 불효자로 남아 버렸다. 하지만 다행스럽게 할머니 같이, 어머니 같이, 관세음보살님 같이 큰스님께서 우리 곁에 남아 계신다.


 꽃그늘 아래에서 김 보살님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시는 큰스님의 모습이 어느 때 홀연히 사라질지 두렵기도 하지만 지금 저기 앉아 계시는 큰 그림자만으로도, 허청허청 걸어가시는 뒷모습만으로도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얼마나 큰 격려가 되는지, 아마 큰스님은 모르고 계실 것이다. 한 집안이 잘 돌아간다는 것은 내 할머니와 같은 분이 계시기 때문이며 절 집이 잘 돌아간다는 것은 큰스님 같은 분이 지키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큰스님의 미소와 온기가 더없이 따스해 보이고 스님의 큰 키가 더더욱 커 보이던, 어느 화창한 봄날의 작은 이야기이다.



(아 참, 그렇게 엥간히 울 할마시 골마리 속 눈깔사탕을 솔래솔래 털어먹으면서 틈만 나면 머리끄뎅이를 쥐어 뜯으며 싸웠던 백 여시같은 언니 가시나는 싸우다 오만정이 들어 버렸는지 지금은 서로 챙겨주기 바쁜, 둘도 없는 자매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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