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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조음 May 28. 2024

철새는 날아가고

 넘실거리는 푸른 강물 위에 새카맣게 내려앉은 철새들, 그들을 향해 두 팔 벌려 우르르 함성을 내지르며 저수지 둑길을 달리던 아이들.

놀라서 우리보다 몇 배는 더 큰소리로 소리를 지르며 하늘을 뒤덮듯 일제히 날아오르는 철새들. 오! 그 푸득 거림이란…ㆍ

  

 이렇듯 내 유년은 저수지에서의 기쁘고 즐거웠던 일로 날마다 가득 채워지는 듯했다.

     

 아이들이 더 이상 저수지에서 놀지 않게 된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TV의 등장 때문이었다. 마치 수천 년 간 고대로 살아온 밀림의 원시 부족들이 백인과 성경책에 무너져  버렸듯이 잘 사는 집 순서대로 TV가 놓이면서 점차 아이들의 사이는 금이 가기 시작했다.


 대문 밖에서 아무리 ‘놀자’ 하고 외쳐도 TV에 눈을 박은 아이는 대답해 주지 않았다. 똘똘하고 용감한 가난한 집 아이보다 TV에서 나오는 것과 똑같은 것들을 사 먹고 사들고 다니는 부잣집 아이가 더 인기가 많았다. 저절로 부잣집 아이에게로 서열이 바뀌었다.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 부잣집 아이의 부하가 되기를 자처했다. 그래야만 문지방 뒤에 앉아서 TV를 얻어 볼 수 있으며, 새우깡 한 쪼가리를 맛볼 수 기 때문이다.


 뒤늦게 우리 집에도 TV를 들여놓았을 때 주파수를 맞추기 위해 높은 지붕 위에서 안테나를 세우려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고정을 하는 모습은, 서울 수복 후 태극기를 달던 군인들의 모습처럼  벅차올랐다.  

 

  TV에 정신을 빼앗긴 것은 비단 애들 뿐만은 아닌 듯했다. 어른들 역시 아이들과 다를 바 없었다. 조용한 얼굴로 태양과 달, 하늘과 별자리, 구름과 바람의 냄새로 날씨를 예견하여 농사일을 의논하던 어른들이 TV속의 일기예보를 더 신뢰했다. 


어른들은 월남 전쟁과, 주한미군 철수, 홍수환, 이미자, 배삼룡ᆢᆢ 이야기로 잡담을 나누었다. 아이들 떠드는 소리로 조용할 날이 없던 마을은 서서히 정적 속으로 빠져들었다.


 대신 아이들은 각자 자기 집 TV앞에 앉아서 나름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타잔을, 전쟁영웅을, 사장님을, 미스코리아를, 가수를, 배우를, 코미디언을...

 TV에 나오는 세계를 곧 손에 쥘 것  같은 기대와 흥분으로 우리는 더 이상 바깥에 나오지 않았다.


  높은 나무에 있는 새알을 훔치러 오르지 않았고 칡뿌리 한쪽을 씹고 싶어서 손톱이 빠지도록 땅을 파지도 않았다. 가재를 잡으러 깊은 계곡을 헤매지도 않았고 논두렁을 뒤지며 개구리를 잡지도 않았다.

그저 하루 온종일 TV가 만들어주는 요술쟁이 세계에서 결코 깨어나고 싶지도 않았다. 않았다ㆍㆍㆍ 


TV만 있으면 행복해질 것 만 같았던 순간도 잠시,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서서히 분노와 원망이 날름거리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부터였다.


‘왜 울 엄마는 저 TV에 나오는 엄마처럼 꽃무늬 홈드레스를 입지도 않으며 도넛도 만들어 주지 않는 것일까? 왜 울 아버지는 저 TV속의 아버지처럼 양복도 고, 자가용도 없으며 회사에 다니지 않을까?


 어느 단란한 가정이 TV 화면에 나타났다.


저녁시간이 되면 아름다운 정원을 가진 양옥집에서는 커피와 과일이 차려진 티 테이블에 어른들이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다. 포크로 과일을 한 조각씩 베어 먹으며 웃고 있으면, 리본 달린 원피스를 곱게 차려입은 아이가 피아노를 연주한다. 연주를 끝낸 아이가 배꼽인사를 하자 어른들은 잘한다며 박수를 친다. 웃음소리를 끝으로 화면은 끝난다.


그걸 멍하니 라보면서 나는 정말 저 TV에서 비치는 화면이 진짜인지, 설정인지 몹시 헷갈려했다.


 왜, 우리 집은 이 모양이며 또한 지금 내 모습은?

나는 저 TV속의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왜 하필이면 홈드레스와 양복은커녕, 자가용과 피아노는커녕, 핑크리본과 원피스는커녕, 당장 끼니를 걱정하며 집이 새는 것을 걱정하며, 고무신조차 제대로 사신지 못하는 지지리 가난한 집에 살게 된 것일까?’


 어린 내가 이러한 생각으로 갸웃거릴 즈음, 벌써 머리가 굵은 아이들 중에는 장롱 깊숙이 넣어둔 돈을 훔쳤다. 소를 몰래 팔아서 밤 도망을 쳤다. 그렇게 아이들이 떠나고 난 뒤에는 어느 집이나 할 것 없이 큰 싸움이 벌어졌고 살림살이가 부서져 나갔다. 여지없이 TV가 박살이 다.


어른들은 어른들 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다들 화가 잔뜩 나 있었지만 속으로는 모두 다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곳을 원망과 분노, 또 다른 한편으로는 희망과 야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곤 하였다.


, 그리고 서울.'


 우리들이 TV속의 환상과 현실 속에서 허우적거릴 때 저수지도 함께 요동을 쳤다.

갈대가 너울거리던 강가에 하나 둘 가든과 술집, 모텔 등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어른들은 겉으로는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개발되는 것을 강하게 반대했지만, 속으로는 땅값을 계산하기 바빴다. 아이들, 어른들, 저수지, 누구라 할 것 없이 희망과  혼돈의 시기를 겪으며 출렁거렸다.


동요를 부르던 아이들의 합창대신 뽕짝과 유행가 가락을 들어야 했고 물수제비를 띄우는 조약돌 대신 술 취한 사람이 내던지는 술병과 담배꽁초를 그대로 받아야만 했다. 그리고 아주 가끔씩 몸을 내던지는 일이 벌어질 때면 저수지는 어찌할 바를 몰라 세찬 물결을 일으키며 곤혹스러워했다.


 수재로 소문난 형욱이 오빠가 팔아먹을 땅덩어리 하나, 소 한 마리가 없어 서울대를 포기하게 되자 술에 취해 울부짖으며 몸을 던졌을 때에 저수지는 제물을 차려놓고 춤을 추던 무녀의 흰 사발에 머리카락 한 올을 담아 주는 걸로 몸을 받은 죄를 대신하였다.


 어디 삶과 죽음이 저 부처님 나라 인도의 갠지스 강에만 있다고 그 누가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바로 여기에, 이 작은 강가에서도 나의 배냇똥 기저귀를 헹구던 물이 흐르고 정순이 할아버지의 뼈 가루가 흐르고,  삶이 흐르는 것을......


 그리하여 우리들 동심의 세계는, 순수의 세계는 그렇게 무소불위의 TV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 시절 TV앞에서 꿈을 꾸었던 아이들 중에서 제대로 꿈을 이루며 살았는지 알길 은 없다. 서울로 간 아이들 중에  성공을 했는지 안 했는지 알고 싶지도 않다. 지금의 아이들과 비교하는 것은 더더욱 안될 말일 것이다. 다만 TV를 따라 성공을 했건 안 했건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땐 그랬었다고.

그렇게 놀았고 그렇게 살았었다고.


 그저 변화와 발전이라는 도도한 흐름에 자연스럽게 흘러갈 수밖에 없었노라고. 그 어떤 힘으로 어린 우리들이 TV의 문명을 거절할 수 있었겠느냐고. 그 어느 세월 속에서든 살아남은 목숨 하나하나가 더 소중한 것 아니겠느냐고.


 항변하는 나에게 저수지는 잔잔한 강바람으로 내 어머니처럼 머리를 자꾸 쓰다듬으며 이야기하는 듯하다.

 

다 이해한다고, 그렇게 변하여 가는 것이 당연한 이치라고, 내가 흘러가듯 너희들도 그렇게 세월을 따라 흘러가는 것임을 진작에 알고 있었다고. 이렇게 살아 있어, 살아 있는 목숨 하나가 있어, 나를 기억하고 추억해 주는 것이 오히려 고마울 따름이라고.


 저수지는 다시 격정으로 물결을 세차게 일으키며 나에게 힘을 주어 말하는 듯하다.


 ‘살아남으라고. 죽은 자는 절대 산 자를 이길 수 없나니, 지는 게 이기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것이 이기는 것이니, 어느 가혹한 시절이든 펄펄 살아서 똑똑히 지켜보라고. 그리고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 그것이 바로 너의 일이라고...’  

   

 그때의 아이들도 가끔은 나처럼 TV가 아닌 저수지의 유년을, 순수를, 해맑음을 기억하리라. 지금도 그때와 다름없이 고즈넉이 잠겨있는 저 저수지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를, 우리들의 초롱한 얼굴들을 다 기억하고 있으리라.


  우리들이 빠뜨려놓은 동전과 구슬들을 되돌려 주려 지금도 품속에 고이 간직하고 있으리라. 그 목소리가 듣고 싶어 그 얼굴들이 보고 싶어 오늘도 저렇듯 그리움으로 파랗게 떨고 있음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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