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

by 눈물과 미소



경희의 생일을 맞아 지훈이 내민 생일 축하 카드에는 우민의 모습이 그려져 있지 않았다. 지훈이 학교에서 그린 가족 그림 속 우민은 경희와 지훈으로부터 조금은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학부모총회에 참석하겠다는 경희를 지훈이 한사코 말린 것은, 그림 옆에 쓰여 있는 행복, 사랑, 위안과 같은 단어에 담긴 소망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였는지, 아니면 돌이킬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좌절감에서였는지 모른다.




빨래 건조대 위에는 마른 지 오래인 빨래가 수납장을 거치지 않고 곧장 갈아입을 옷이 되기를 기다렸고, 싱크대의 음식물 쓰레기가 추운 날씨에도 상한 냄새를 풍겼다. 지훈은 더 이상 ‘그 눈빛’을 보내지는 않았다. 그 대신 경희의 눈에 스스로를 향한 그 눈빛이 자리 잡게 되었고, 지훈의 눈에는 하루만큼의 체념이 쌓여갔다. 우민은 뜻 모를 한숨을 이따금씩 내뱉었다.


경희는 창문 앞에 설 때마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러다가 정말 투신을 해버릴 것만 같아서,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이것저것 질문하더니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 진단 검사지를 내밀었고, 경희로 하여금 그동안 있었던 일을 글로 써보라고 권유했다.


집으로 향하는 길에 경희는 일기를 쓰기로 다짐했다. 글을 쓰면서 우민과 지훈, 그리고 가정에 대한 생각과, 스스로의 삶에 대한 생각을 정리할 수 있기를 소망했다. 다시 생에의 의지를 불태울 수 있다면 다행일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글은 유서가 될 터였다. 어느 쪽이 될지 모르지만, 경희는 일단 글을 써보기로 했다.


무얼 어디서부터 써야 할까, 그 어떤 것이라도 쓸 수나 있을까, 막상 글을 쓰려니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자판 위에 놓인 손가락은 마비된 것처럼 멈추어 있고, 자꾸만 눈물이 흘러나와 손등과 자판을 적셨다.




“서로 데면데면하게 지내는 한이 있더라도 네가 참거라. 그러다 보면 좋은 날도 오는 법이다.”


오랜 고민 끝에 어머니의 말로 경희는 글을 시작했다. 글을 쓸수록 세 가지가 분명해졌다. 첫 번째는 살아야겠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이 모든 일에 경희가 죄책감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세 번째는 우민은 자신과 여생을 함께 할 만한 동지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세 번째 생각을 확고히 하는 또 다른 일이 있었는데, 경희의 일기에 대한 것이다. 지긋지긋한 결혼생활에서 탈출하고자 경희는 우민에게 원고를 전송했다. 그리고 합의 이혼을 할지, 아니면 이 원고를 출판하여 사람들과 공유할지를 결정하라고 했다.


글을 읽어본 우민은 “이런 글로 독자를 모을 수나 있겠나?”라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우민은, 자신의 생명을 잇기 위한 경희의 어쩌면 마지막일지 모를 처절한 몸부림에마저 비웃음으로 화답했다.


물론, 우민은 두려워서 그랬을 것이다.

사랑에 빠져버렸다는 사실이 두려웠을 것이고, 그 사실을 경희가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 두려웠을 것이다. 게다가 자신의 이야기가 글로 출판될 것이라는 사실이 두려웠을 것이다. 따라서 우민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일들은 자신의 부정을 확증하는 계기가 되었고, 어떤 일들은 경희에 대한 가학 행위가 되고 말았다.


그게 우리 관계의 비극이야, 경희는 속으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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