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쾌하게 적을 무찌를 기회는 없었느냐고? 글쎄, 삶은 ‘그 이후로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끝나는 것이 아닌가 봐. 게다가 계속 생각하게 되는 점은, 그 사람들 자체가 내가 싸워 이겨야 할 대상이 아니고, 그 사람들로 하여금 그렇게 작당을 하도록 조종하는 진짜 배후 세력이 문제인 거니까.
실은, 이것이 정녕 내게 주어진 복수의 기회인가, 하는 일이 있긴 있었어. 당장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인 상황인데 하필 모든 파일이 저장되어 있는 학교 노트북이 고장이 난 거야. 컴퓨터 수리 기사님께서 학교에 오시는 날은 하루가 남아있는 상태였고. 대략 난감해하고 있었는데, 계약기간을 마치게 된 그 여자가 마침 노트북을 반납하러 왔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라며 한 차례 더 내 속을 뒤집는 인삿말을 건넨 후 교무실을 나가자마자, 노트북 수거 담당 선생님께 요청을 드렸어. ‘제 컴퓨터가 고장이 났으니 제가 심하주 선생님 노트북을 임시로 사용해도 될까요?’라고 말이야. 그렇게 해서 나는 그 여자의 노트북을 손에 넣었지.
나를 괴롭히기 위해 그 여자가 사용한 ‘증거물’을 손에 받아 드는데, 가슴이 요동쳤어. 기도를 하고, 심호흡을 하고, 떨리는 손으로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지.
다운로드 받은 파일 기록, 최신 문서, 사진 및 스크린샷 폴더 등을 하나씩, 하나씩 열어보았어. 주도면밀하게 증거를 삭제해 두긴 했더라고. 내가 시험지를 도둑맞은 직후 여자의 업무 협조 요청을 거절하며 보냈던 메시지 캡처 화면 말고는 이렇다 할 자료를 찾을 수 없었지. 대화 기록도 살뜰히 삭제했더라고.
하지만 인터넷 및 문서 검색 기록을 삭제하는 것은 깜빡했나 봐. 내가 약 5년 전에 작성한 보고서, 1년 전에 작성한 보고서, (그 여자의 업무 처리와 전혀 관계없는) 나의 업무 관련 서류, 내가 학생들과 수업할 때 사용하는 온라인 페이지 등을 열어본 기록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어. 또 다른 정황 상의 증거일 뿐, 경찰에 들이밀 수 있는 어떤 서류도 남아있지는 않았지.
솔직히 한동안 속이 많이 쓰렸어. 노트북을 내 손에 안겨주신 것은 최후 승리의 기회를 선물로 주신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라고 은연중에 확신하고 있었나 봐. 그런데 막상 아무것도 손에 쥔 것이 없으니 허탈했던 거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를 모두 진멸하고 수치를 당하게 하실 거라는 예레미야 구절을 읽으면서도 노트북을 받아 들던 순간처럼 흥이 나지는 않더라. 그래서 글을 마저 쓰기 시작했어. 그 여자의 노트북으로 말이야. 그러다 보니 마치 하나님께서 ‘사랑아, 복수는 너의 영역이 아니란다.’라고 말씀하시며 내 등을 토닥이시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드네. 그 약속은 내가 꼭 이룰 테니 넌 네게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려무나. 사랑아, 나와 함께 가자, 하고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