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로 한껏 밀려 있던 차의 조수석을 보고 이상한 직감이 들었던 것이 일의 전조증상이었다.
키가 한 2미터는 되는 사람이 탔었나 보네, 경희는 말했다.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린 블랙박스를 차량 포켓에 좀 넣어달라고 우민은 말했다.
경희의 직감이 확신으로 변한 것은 다음 금요일 야심한 밤, 우민이 샤워할 때 침 뱉는 소리를 들은 순간이었다.
‘네 몸은 더러워’라고 비웃는 것만 같은 그 소리를 경희는 싫어했지만, 입에 담는 일은 없었다. 따라서 관계 후마다 들려오는 그 소리를 멈출 길도 없었다.
그날 밤, 경희는 관계를 하지 않고도 그 소리를 들었다. 현관문을 닫고 집으로 들어서던 우민이 거실 책상에서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던 경희를 보고 흠칫 놀란 것은 우연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밤새 뒤척이던 경희는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에 곧장 몸을 일으켰다. 아침부터 어디를 가는 것인지 따져 묻는 경희에게, 우민은 족구 하러 간다고 답했다. 발에 묻은 먼지를 털고 집으로 들어오며, 경희는 그 길로 입을 닫았다.
경희가 어려서부터 잠귀가 밝았노라고, 어머니는 늘 이야기했었다.
‘의심’ 혹은 ‘사건’의 발단이었다.
성탄절을 앞둔 주말, 경희는 친정에 다녀왔다. 어머니가 양손 가득 챙겨 준 반찬을 냉장고에 정리해 넣다가 하필 유리병을 깼다.
유리 파편을 봉지에 주워 담은 후, 아이가 발을 다칠까 염려가 되었던 경희는 키친타월에 물을 묻혀 부엌과 안방 침실 입구까지 통하는 넓은 범위의 바닥을 훔치기 시작했다. 키친타월로 한 번, 두 번, 세 번 바닥을 닦아내며 경희는 작은 유리 파편과 함께 여기저기 떨어져 있던 머리카락도 닦아냈다.
잿빛이 된 키친타월을 보시면
질겁을 하셨겠지.
어린 시절부터 봐오던, 늘상 바닥을 걸레로 훔치는 부지런한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며 미소를 짓다가, 경희는 부지런히 움직이던 손을 잠시 멈추었다. 그리고 키친타월을 들여다보았다.
집에 돌아왔을 때의 어수선함이 싫어 외출하기 전 대강 정리를 하는 편이지만, 그날 아침은 유독 부지런을 떨어 아이의 장난감과 책도 말끔하게 정리하고, 빨래를 너는 동안 옷이며 양말에서 떨어져 나온 먼지를 제거하기 위해 진공청소기를 한 차례 더 돌렸더랬다.
하지만 하루 종일 집을 비우고 돌아온 지금, 머리카락이 많이 떨어져 있었다.
키친타월에는,
밝은 갈색의, 중단발 정도 되는 길이의 낯선 머리카락과,
비슷한 굵기와 색상이지만 길이가 짧고 구불거리는 머리카락과,
경희에게 익숙한 다른 체모가 한데 뒤엉켜 있었다.
경희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식탁 위에 올려져 있던, 뜯지 않은 모과차 병이 눈에 들어왔다.
이미 휴지통에 집어넣었던 키친타월을 확인하기 위해 뒤진 쓰레기통에 있던, 땅콩버터와 바나나에 대한 00312번 반품 영수증과, 땅콩버터만 매출 취소하고 2,980원짜리 바나나만 구입하여 30% 할인된 가격인 2,020원 만을 결재한 내역에 대한 00313번 영수증이 눈에 들어왔다.
분리수거함 속에 들어있던, 크래커 봉지와, 차돌박이 팩 두 개가 눈에 들어왔다.
며칠 전 아이들을 위해 차돌박이 파스타를 해주던 우민의 모습이 떠올랐다.
삶고 남은 면을 넣어 뚜껑으로 밀봉한 채 며칠 째 부엌을 지키고 있던 플라스틱 원형 통의 뚜껑만 남아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개수대의 파스타면과 기름으로 볶아낸 흔적이 있는 파와 생 마늘의 끄트머리 조각이 눈에 들어왔다.
땅콩버터가 묻은 채 물에 잠겨 있는, 큰 숟가락 하나와 작은 숟가락 한 개가 눈에 들어왔다.
먹으면서 바스러져 떨어진 것 같지는 않은, 그저 땅콩샌드를 제조하는 과정에서 떨어졌을 법하게 드문드문 떨어진 크래커 가루가 눈에 들어왔다.
아이에게 위치를 확인하고는 화들짝 놀라던, 수화기 너머 들려오던 우민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스토브탑 위의, 파스타면을 삶아낸 전분의 흔적이 말라 얼룩을 이루고 있는 부분과 여기저기 튀어 있는 기름 방울이 눈에 들어왔다.
세탁기 안에 들어있는, 아침에 빨래를 널 때 빼먹고 널지 않은 쭈글쭈글한 그대로가 아닌, 입었던 흔적이 있는, 다른 운동복과 함께 들어있지는 않은 우민의 속옷 한 장이 세탁기 안에 들어 있었다.
엉성하게 접힌 채 안방 침대 머리맡에 올려져 있던, 세탁하여 벽장에 넣어두었었고 간밤에는 꺼내 사용한 일이 없는 담요가 눈에 들어왔다.
경희가 평소 빨래를 널 때 사용하지 않는, 빨래 건조대의 모서리진 구간에 올려져 있는 양말들과, 건조대 위로 미처 올라가지 못하고 주위에 떨어져 있는 양말들이 눈에 들어왔다.
한여름 더위를 이기기 위해 거실 에어컨을 틀어놓고 온 가족이 옹기종기 자고 일어난 아침, 요를 걷었을 때와 같이 모가 일정한 방향으로 가지런히 누워 있는 카펫이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가 떼어 수저통 아래에 다소곳이 넣어둔, 동료의 마음이 고마워 부엌 한쪽에 붙여두고 볼 때마다 우민의 건강을 기원하던, 접착 메모가 눈에 들어왔다.
경희는 하나하나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며칠간 경희는 새로운 발견을 이어나갔다.
유통기한이 1년 정도 지난, 집 찬장에 들어있던 땅콩버터 통의 사진도 찍었다.
다음날 집에 돌아온, 기름기까지 제거되지는 않은, 물기가 여전히 남아 있는 원형 플라스틱 통의 몸체의 사진도 찍었다.
우민은 다음 날 통을 한 차례 더 잘 씻어두었고, 경희는 물기가 남아있는 통의 사진을 한 컷 더 남겨두었다.
집안 곳곳에 비치해 두었던 라벤더 오일이 사라진 것이나 아끼던 티백이 없어졌던 것은 사진으로 남길 수 없었다.
다시 돌아와 원래 보관하던 상자가 아닌 다른 곳에 들어 있는 티백의 사진은 남길 수 있었다.
이상한 일들도 이어졌다.
카톡 친구가 아닌 미상의 여성으로부터 부재중 카톡 콜이 걸려오거나,
(을질 사건의 일환이며 음독이 두려운 까닭에) 매일 아침 출근하자마자 컵을 씻을 때 사용하는 실리콘 솔에 머리카락이 칭칭 감겨있거나,
사무실에 라벤더 오일 향이 진동을 하는 일과 같은 것이었다.
“학교에서도 이런 식으로 사람 의심하고 다니나?”라고 우민이 받아쳤다.
“언니와 박우민 집사님의 모범적인 가정이 너무 부러워서 결혼에 대한 제 생각이 바뀌었어요. 제가 방금 말한 것에 대한 언니의 생각은 어때요?”라고 교회 동생은 안광을 쏘며 덧붙였다.
“사방에 우겨쌈을 당한 뭐 그런 거 아니니까 이 사람 저 사람 의심하지 말고 좀,” 이라고 전도사도 거들었다.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쫓겨나 그만 휴지통 신세가 되었으나, 놀랍게도 다음날 선반 위에 스스로 올라갔을지도 모를 티백마저도,
온 세상이 경희의 절망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우민의 말처럼, 그 어떤 것도 법정 증거는 아니었다.
여성은 모근을 휴지로 문질러 훼손하거나 잘 잘라두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