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개인취향
2월에 태어난 나는 생일이 빠르다는 이유로 1년 일찍 학교에 입학했고,
그렇게 초등학교, 중학교 그리고 고등학교까지 같은 반 아이들보다 한살이 어렸지만, 19살이 되던 해에 무사히 대학교를 입학했다.
부모님은 해외로 이민을 가셨기 때문에 19살부터 독립을 시작했고 엄마의 음식이 그립기 시작했을 무렵, 친오빠와 함께 살면서(친오빠는 군대를 다녀오느라 떨어져있었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레시피를 적고 요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흠, 멸치액젓 냄새 너무 비린거같은데..이거 넣는게 맞다고? 이상한데?’ 라며
엄마의 레시피에 불신을 가지고 양념을 혼자 만들기 시작하면서 당시의 몸무게가 인생에 가장 낮은 숫자였던 경험을 한 적이 있다.
그렇게 나는 집밥을 해먹기 시작하면서 맛있는 한 끼에 대한 소중함을 배웠다. 밥을 만드는 것 자체가 아주 큰 노동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나의 이십대 초반을 떠올려 보면, 살면서 직면하는 모든 새로움에 지금보다는 훨씬 낯설어함 없이 나아갔다.
예를 들면, 혼자 마트에 가서 과도칼을 사서 참외를 깍아 먹어보고, 혼자 고장난 세탁기를 고치기 위한 AS전화를 해보고 세탁기를 기다리는 동안 스스로 옷을 빨아보기도 하고 말이다.
당시엔 스마트폰이 없었기 때문에 직접 찾아서 발로 뛰는 일이 많았고 어렸던 나는 누군가에게 물어볼 생각도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작디 작은 나의 자취방은 새로운 도전을 계속 계속 하기위한 마라톤 출발선이었다. ‘레디~꼬!’
나는 20대 중반에 남편을 만나 연애와 결혼을 했고, 빠르다면 빠르고 아니라면 아닐 수 있는 20대 후반의 결혼은 내가 꿈꾸던 신혼생활을 즐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특히 결혼과 동시에 터진 코로나로 해외여행은 커녕 국내여행도 가는 것이 어려웠지만 집순이, 집돌이에겐 아주 힘든일은 아니였다.
오히려 함께 요리해 먹을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이 생겼고 함께 볼 영화와 드라마, 예능이 많아 시간가는 줄 몰랐다. 우리가 살던 집은 2층 서남향집으로 해가 오후에 잠깐 들어오기 때문에 어둡고 컴컴하진 않지만 밝은 집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뜨겁도록 쨍쨍한 8월의 여름 날씨를 제일 좋아하고, 한여름날 뜨겁게 달궈진 차 안에 들어가면 '어허이~ 뜨끈뜨끈하니 좋다'라며 그 뜨거움을 즐겼고, 쨍한 날에 걸을 땐 손을 뻗어 '이야~ 아주 쨍쨍하구나' 비타민D를 받아야한다며 설쳐대곤 하는 사람이었기에 쨍쨍한 날씨가 가장 좋은 사람인 나에게는 조금 아쉬웠던 부분이 있는 집이었다.
누구나 원하는 집의 모양이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넓고 층고가 높은 집, 누군가는 높은 고층의 아파트, 누군가는 산속 깊은 곳에 고즈넉히 자리잡은 통나무집, 누군가는 바다를 바라보는 집 등 다양한 집의 형태와 느낌은 각자 전부 다를 것이다.
내가 꿈꿔오던 집의 형태는 햇빛이 아주 쨍쨍하게 들어오는 남향에 자리잡고 텃밭도 키우고 자연광도 받는 따뜻한 집.
결혼 3년차에 우리는 각자 그리고 함께 모은 돈과 새로운 우리집을 구하기로 했다. 물론 은행도 함께 지분을 공유하겠지만, 첫 우리집을 찾아보기로 했다.
서울을 벗어나 조금 외지지만 항상 따듯한 색을 보여주는 그런 집을 찾아 다녔다. 따뜻한 색, 너무 추상적일 수 있겠지만 나도 정확히 어떤 집을 찾는 것인지 어떤 색을 찾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시간이 날 때마다 남편과 발로 뛰며 이 곳 저 곳을 다닌 결과 자꾸 눈이 더 가는 집들의 주변이 전부 산 아래에 위치해 있어 상가나 편리한 시설로부터 조금은 떨어져있지만 주변이 조용하고 나무가 많아 집으로 가는 길까지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그런 곳이었다.
작은 산이라도 주변에 있는 곳이기를 바랐던 것 같다. 남편은 웃으며 말했다.
'너가 좋다고 하는 곳은 다 주변이 비슷하게 생겼어 너도 참 취향이 확고하다'.
그 때 남편과 우리집을 찾기 위해 돌아다니며 느꼈던 살랑이던 기분은 처음 느껴보는 두근대로 설레이는 어떤 새로운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