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의 어느 해 12월을 퇴사로 마무리하고 다음 새해를 맞았다. 겨울이라 찌뿌둥한 몸상태를 핑계 삼아 자주 누웠다. 까무룩 잠이 들기도 했지만 대체로 이런저런 생각들, 앞으로의 계획들, 이후 어떤 일이 벌어질까 기대 반 걱정 반... 머릿속 상상의 세계는 점점 더 확장되어 갔다.
생각나는 대로 그냥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해보았다. 모르면 인터넷과 책을 찾아가며 배웠다. 꽤 재미있었지만 동시에 허탈했다. 남들은 쉽게 통과된 것처럼 보였던 일도 나에겐 장애물이 가로막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떤 일은 포기했고 어떤 일은 뒤로 미뤘으며 어떤 일은 그냥 둬보기도 했다. 또 어떤 일은 다시 시작하기도 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걱정거리는 있어도 거벼운 마음으로 살려고 노력했다.
'해볼까?' 했던그 많던 일들 중 한 가지가 요양보호사 취득이었다. 부모님의 연세를 가늠해 보면서 혹시나 모를 일에 대비하고 싶었다. 시간부자가 됐으니 요양시설에 의존하기보다는 내 손으로 돌봐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또 다른 이유라면 하루 4시간 정도의 일을 하며 내 일상의 질서도 찾고 싶었다. 밥 챙겨 먹기도 사람 만나는 것도 다 귀찮아지고 있던 참이었다. 혼자서도 잘 지내는 사람이지만 소통하면 더 건강하게 살다 간다는 것은 알고 있다.
자발적 퇴사 이후 정규적인 일을 할 생각은 없었다. 몸상태가 좋지 않아 힘들었던 그 당시의 계획은 이젠 더 이상 일하지 않으리! 였으나, 40년 넘게 사회화된 인간의 머릿속에는 '일 하지 않는 자...' 이런 생각들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머릿속에 계속 떠오는다면 일단 해봐야 안다. 검색해 보니 요양보호사는 24년 기준으로 이수해야 할 교육시간이 240시간에서 320시간 변경되었다.늘어난 80시간은 치매 및 기타 교육으로 23년까지는따로 교육을 이수해야 했던 치매 분야가 통합되었다고 한다.요양보호사의 업무가 노인성질환의 수급자를 돌보는 일이다 보니 늘어난 교육시간이 부담되긴 했지만 이해되었다. 그만큼 교육비용도 늘었다. 교육비는 국민취업지원제도의 내일 배움 카드를 신청한 사람이라면 10%를 지원받을 수 있다. 23년까지는 지원비가 더 높았다고 한다. 교육을 받는 인원에 비해 취업자 수가 적어 6개월 내 취업해서 180일 이상 일한 후 90%를 환급받도록 제도가 바뀌었다.
퇴사 전에 요양보호사 취득시간에 대해 듣긴 했지만 그때는 직장일에 매어 있다 보니 교육받을 여유가 없었다. 퇴근 후 4시간을 다시 앉아있어야 했기 때문에 체력이 약한 나에겐 무리였다. 어떤 일이 일어나려면 다 때가 맞아야 하는 것 같다. 내 노력과 의지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지금이 바로 그때가 아닐까.
자리를 털고 일어나 쌩쌩 겨울바람이 부는 산책길에 나섰다. 요양보호사교육원에 전화 문의를 해 보았다. 낯선 누군가와 전화로 통화한다는 건 여전히 긴장되는 일이다. 몇 번을 생각해 보고 몇 군데 전화해 미리 메모해 놓은 질문을 이것저것 했는데 역시나 까먹고 묻지 못한 질문이 있었다. 궁금증을 다 해소하진 못했지만 그중 속 시원히 대답해 주는 곳을 최종 선택했다. 다행히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교육 신청을 하러 갔다가 함께 교육을 들을 같은 기수의 수강생을 만났다. 외국인이었지만 한국말을 유창하게 하는 새댁이었다. 오랜만에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게 된 겨울 어느 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그리 춥지만은 않았다. 새로운 일을 한 가지 계획한 어느 내향인은 약간의 긴장과 설렘으로 발걸음에 힘이 좀 들어갔었나 보다.
지치고 힘들 땐 새로움보다는 익숙함을 선호한다.
자발적 퇴사 후 무언가를 시도하고 있는 나를 보니, 마음의 에너지가 다시 차오르고 있는 것 같았다. 새로움을 받아들일 만큼 몸과 마음에 여유가 생겼으니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