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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애 Jun 11. 2024

나는 흔들린다

“동서, 나 이것 좀 알려줘. 전에 배웠는데 또 잊어버렸네.”

설에 차례 음식 준비를 끝내고 한숨 돌리고 있으려니 형님이 핸드폰의 기능을 알려 달란다. 70이 넘은 형님은 배워야 할 것이 너무 많은데 나이 니 쉽지 않다고 푸념하면서도 열심히 익힌다. 여러 번 연습하면서도 내일은 또 잊을 수도 있다며 걱정한다. 그러면 또 배우면 된다고, 그리고 아이들 왔을 때 알려 달라고 하면 된다고 하니 바쁜 애들에게 물어보기가 미안하단다. 가르쳐주는데 크게 어렵지 않다고 말하려다가 딸들 이야기할 때는 늘 ‘바쁜 애들, 고생하는 애들’이란 말을 붙이는 형님이기에 그냥 웃고 넘어갔다.

명절 준비로 몸에 밴 기름기도 뺄 겸 함께 근처 공원에 갔다. 우리들이 좋아하던 카페가 있어 찾아갔는데 주인이 바뀌었는지 실내도 인테리어가 달라졌고 주문시스템도 기계로 바뀌었다. 커피를 사겠다던 형님은 카드를 나에게 건네주며 이제는 커피도 못 사 먹을 것 같다며 자리에 앉았다. 갈수록 할 수 있는 것이 줄어든다고 한탄하며 한참 풀이 죽었다. 아직도 아들과 남편 건사하며 야무지게 살림하고 있는데 낯선 것, 변화하는 것들을 보면 이렇게 기가 죽는단다. 물어보면 다들 친절하게 알려 주니 젊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면 된다고 위로해 보았지만 크게 효과는 없는 듯했다. 독일 여행을 함께 다녀오면서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는 것을 유난히 불편해하는 형님의 모습을 보았기에 그 기죽은 모습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파견 나간 남편을 따라 독일에서 생활하고 있는 형님 딸의 초대로 지난해 함께 독일에 다녀왔다. 여행을 준비하면서부터 형님은 기대보다 걱정이 더 많았다. 컴퓨터로 진행되는 많은 준비과정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큰딸 부부에게 의지해야 하는 것이 걱정의 시작이었다. 이런 것도 스스로 처리하지 못해서 바쁜 애들 불러서 고생시킨다고. 이러면서 여행을 가야 하느냐고 푸념하였다. 괜찮다고, 엄마는 그냥 즐겁게 다녀만 오면 된다고 말하던 딸도 계속되는 형님의 푸념에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엄마, 우리가 다 해 주는데 무슨 걱정이 그렇게 많아? 엄마는 그냥 다녀오기만 하면 된다니까.”

싸해지는 분위기를 생각하여 '형님 또래의 어른들은 다 그렇다고, 인터넷뱅킹도 인터넷 인증시스템도 접속할 줄 모르는 사람 많다고, 그 어려운 것 굳이 배울 생각 말고 애들에게 의지하면 된다'라고 내가 나서서 위로해 보았지만 형님의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이러한 푸념은 여행 중에도 계속되었다. 외국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외국돈도 쓸 줄 모르고, 어디 혼자서는 나가지도 못하니 나는 바보라고.... 그때마다 '우리나라가 아니니 당연한 일이라고, 나도 마찬가지라고, 여기서는 딸과 사위가 있으니 그저 애들이 이끄는 대로 따라다니면서 즐기면 된다'라고 몇 번이고 말했지만 소용없었다. 낯선 환경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형님의 모습이 답답하기도 했는데 육회 사건 이후로는 그런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한국식당의 비싼 육회를 좋아한다는 손자의 이야기를 듣고 형님이 직접 만들어보면 어떨까 물어왔다. 본래 음식솜씨가 좋은 형님인지라 그도 괜찮을 듯했다. 독일은 고깃값이 워낙 싸서 저렴하게 재료를 구입하여 육회를 만들었다. 평소와 달리 걱정을 많이 하며 만들어 놓은 육회는 비주얼과 맛이 아주 훌륭했다. 아이들이 먹어본 후 정말 감탄하는 표정을 짓자 형님은 그제야 안심하며 진심으로 좋아하였다. 딸의 요구대로 넉넉하게 육회 양념을 만들면서 레시피를 설명하는 형님의 모습은 어느 때보다도 행복해 보였다. 그 모습이 재미있어서 동영상으로 찍어 주었더니 형님은 이후 수시로 동영상을 보며 웃곤 했다. 그게 그렇게 재미있어요? 그럼 애들이 이렇게 좋아하잖아. 내가 뭐라도 해 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 한국에 오면 맛있는 것 많이 만들어 줘야지.

이제는 다 커서 독립적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형님에게 자식들은 보살펴주고 싶은 대상인가 보다. 그리고 엄마로서, 할머니로서의 역할을 할 때 기쁨을 느끼는 듯하였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면서, 또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형님이 원하는 대로 살기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오히려 자식의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늘어가고 있는데 형님에게는 아직 그러한 것들이 용납되지 않는 것 같다. 그 간극만큼 속상할 때도 많은 것 같고.

노부모를 돌보고 있는 친구들이 부모가 말을 안 듣고 고집 피워서 정말 힘들고 속상하다는 말을 많이 한다. 자식 위한다고 이것저것 하지만 결국은 일을 저지르고 만다고, 그냥 늙음을 인정하고 자식의 말을 잘 듣는 것이 정말 자식을 위하는 것임을 모른다고.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친구의 편이 되어 나이 들면 우리는 자식들 말을 잘 듣자고 이야기하곤 했다. 그러나 형님을 보면서 나는 흔들리고 있다. 노인들의 불편함을 개선하려는 노력은 보이지 않고 뒷전으로 밀어내기만 하는 세상을 보면서 나는 흔들리고 있다. 노인이어도 주도적으로 살고자 하는 마음은 여전히 있는데, 많은 부분에서 어른으로 잘 살아내고 있는데 그러한 모습은 외면당하고 어린아이 취급을 받는 경우를 보면서 나는 흔들리고 있다.

#형님

#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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