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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애 Oct 15. 2024

바람을 닮은 그녀

봉숭아 물들이고 가셔요.”

봉수산 휴양림에 접어들었을 때 초입의 정자에 앉아 있던 여인이 말을 건네왔다. 정자 주변에는 몇 채의 건물이 있고, 그 옆으로 다양한 봉숭아를 심어 놓은 정갈한 화단이 있다.

“그래도 돼요?”

“네. 체험을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이니 하고 가면 좋죠. 여기에 봉숭아를 따서 담아 오셔요.”

조그만 채반에 봉숭아 꽃잎과 이파리를 따다 보니 옛날 생각이 절로 난다. 뒤란 장독대 옆에서 피어나던 봉숭아로 해마다 물을 들이곤 했었다. 봉숭아를 절구에 찧어서 새끼손톱에 얹은 후 랩으로 감쌌다. 3시간 정도면 물이 들 거란다.

“숲을 걸으려 하는데 어디로 가면 좋을까요?”

“그럼 제가 안내할게요. 오늘은 안 걸어서 저도 걸어야 하거든요.”

숲 해설사인 그녀 - 닉네임이 바람이라 했다 - 의 제안이 조금 부담스럽긴 했지만 함께 출발했다.

“이것은 등골 나무, 이것은 꽃댕강, 이것은 산초나무, 산초 한 잎 따서 몸에 붙이셔요. 기피제의 효과가 있어요.”

산초잎을 붙이니 조금은 자연인이 된 듯해 마주 보고 웃었다. 추어탕에 넣어 먹던 산초밖에 알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하며.

조금 앞서가는 그녀는 숲을 이리저리 살피며 나무의 이름과 특성에 대해 조곤조곤 이야기한다. 그녀가 보여 준 나무들은 숲을 걷는 동안 특별하게 눈에 들어와 되새김질하게 된다. 이름을 안다는 것이 이런 거구나.

“저기 나방 보이세요? 태극나방이네.”

그녀가 가리키는 곳을 살펴보는데 내 눈엔 보이지 않는다. 한참을 살펴본 후에야 나뭇잎과 비슷한 나방을 발견했다.

“저런 것을 어떻게 볼 수 있죠?”

“관심을 기울여 살펴보면 숲 속의 많은 것들이 보여요.”

숲 해설사 자격증을 준비할 때부터 시작한 공부를 틈틈이 하고 있지만 숲에서의 생활에서 더 많이 배운단다.

“오소리똥굴 알아요? 오소리는 굴을 만들어 그곳에 사는데 가까운 곳에 똥굴을 따로 만들어 거기에 똥을 누더라고요. 깔끔하죠? 이 오소리들은 움직일 때 길을 만드는데 그 길이 가느다랗거든요? 거기에서 나온 단어가 오솔길이에요.”

잠시 후 그녀는 우리에게 오소리굴을 보여 준다. 그녀가 찾아 준 오소리굴은 매끄럽고 깔끔하다. 그 오소리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실제로 오소리가 똥을 눈 오소리똥굴이 있다. 분해자들이 함께 있는 오소리똥굴을 보여주면서 그녀는 함께 살아가는 생태계를 이야기한다. 숲의 철학이다.

유심히 나무를 살피던 그녀가 구멍이 많은 나무를 가리키며 이야기한다.

“딱따구리는 햇볕이 잘 드는 곳에 집을 짓지요. 이쪽으로 구멍이 많은 것 보이시죠? 이 나무속을 파서 집을 짓는데 딱따구리는 집을 여러 개 만들어 놓아요. 간혹 다른 새들이 딱따구리의 집을 차지하기도 하는데 그러면 딱따구리는 그들을 내쫓지 않고 다음 집으로 옮겨가죠.”

그저 푸르른 길이었던 숲을 그녀와 함께 걸으니 숲이 자연의 삶의 현장으로 다가온다. 많은 생명체들이 자신의 방식대로, 그러면서도 적절히 어우러지며 살아가는 터전. 활기 있는 삶의 현장이다.

“해설사님은 숲을 빨리 못 걷죠?. 이렇게 많은 것을 발견하면서 가니.... 어떻게 그게 가능하죠?”

“‘알아차림’이란 생각이 들어요. 주의 깊게 살펴보면 그들이 거기 있음을 알아차리는 거죠. 이렇게 숲을 알아가면서 요즘은 제 마음을 알아차리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나에게 집중하며 나의 현재 모습을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더운 여름날인데도 숲길에는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멀리 보이는 예당호에서 불어오는 바람일까, 무성한 숲이 만들어낸 바람일까, 그냥 두고 가기 아까워 앉아서 쉴 만한 곳을 물으니 소나무 숲으로 안내한다. 깊은 그늘이 드리운 소나무숲에 앉아 푸른 바람을 맞으니 마음이 평온해진다.

“이곳에서 해먹 명상을 하기도 하는데 한번 해보실래요? 제가 가서 해먹을 가져올게요. 해먹에 몸을 뉘이고 자신의 몸의 움직임과 호흡을 느끼는 명상이에요. 해먹에 누워서 부드러운 흔들림에 몸을 맡기고 천천히 깊게 호흡하면 몸과 마음이 이완되면서 편안한 휴식이 찾아오죠.”

“사람들이 오면 늘 이렇게 무언가를 해 주고 싶으시죠?”

“그분들이 어디까지 원하실까 알아차리기 위해 노력해요. 그런데 여러분에게는 많은 것을 해 주고 싶네요.”

프로그램을 예약하고 온 것도 아닌데 너무 폐를 끼치는 것 같아 해먹 명상은 사양하고 솔바람숲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숲의 많은 나무 중 어느 나무를 좋아해요?”

“나무는 다 좋지만 집에는 감나무를 심고 싶어요. 감나무의 달달한 열매와 까치밥의 나눔이 좋더라고요.”

“숲에 살면 사람도 자연이 되어가나 봐요. 닉네임 바람처럼요.”

“닉네임을 ‘바람’으로 지을 때 누군가를 시원하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였어요. 그런데 지금은 자연의 순리에 따라 불어 가는 바람처럼 살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는데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참 좋네요. 감사합니다.”

여행을 하다 보면 생각지 못했던 곳에서 특별한 감동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그녀와 함께 한 숲길 산책, 아니 인문학 산책이 그러한 시간이었다. 깊은 여운을 가슴에 품고 내려오는 길, 그녀의 인사로 마음이 더 훈훈해졌다.

“여러분과 함께 한 시간이 저에게도 특별한 선물 같은 시간이었어요. 나머지 여행도 편안하고 풍요롭길 바랍니다.”


#봉수산휴양림 #숲해설사 #산초나무 #해먹명상 #바람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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