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가래떡을 주었다. 양이 꽤 많았다. 어떻게 보관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일부는 얼리고 일부는 떡볶이와 떡국용으로 썰어서 보관하기로 했다. 떡을 좀 굳혀서 썰기 좋은 상태가 되도록 기다렸다. 이틀 정도 굳힌 후 떡을 썰었다. 칼끝에서 잘려 나오는 떡의 모양이 예뻤다. 기분이 좋다. 떡을 예쁘게 썰어야 예쁜 딸 낳는다는 할머니의 말이 귓전에 들리는 듯하다. 어느새 나는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있다.
설날을 1주일쯤 앞두고 엄마는 방앗간에서 가래떡을 뽑아 왔다. 12명이나 되는 대식구이기도 했지만 1년에 한 번 하는 것이라 그런지 큰 다라이가 가득 차도록 많은 양의 떡을 했다. 방앗간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가래떡을 찾아온 날은 온 가족이 모여 앉아 떡잔치를 벌였다. 미리 고아 놓은 조청에 찍어 먹는 가래떡은 정말 꿀맛이었다. 떡국을 위한 가래떡은 시원한 방에 죽 늘어놓아 이틀 정도 굳혔다. 떡이 어느 정도 굳으면 온 식구가 모여 앉아 가래떡을 썰었다. 워낙 많은 양이라 다들 매달려 썰어도 쌓여 있는 떡이 쉽사리 줄지 않았다. 아버지가 칼을 날카롭게 갈아 주었지만 손에 힘이 많이 들어갔다. 요령 없이 하다가 손에 물집이 잡히기도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떡은 두껍고 커졌다. 엄마는 얇게 해야 떡국이 맛있다 했지만, 빨리 마치는 것이 목적인 우리들에게는 별 소용이 없었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가 옆에서 말씀하셨다. 떡을 예쁘게 썰어야 예쁜 딸 낳는다고.... 그러나 송편이나 만두를 빚을 때도 들었던 말이라 효과가 크진 않았다. 그보다는 떡국을 먹으면서 누가 썰었는지 서로 놀리는 말이 걱정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버지가 썬 떡이 가장 두꺼웠기에 우리들의 떡은 직접적인 공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었다.
식구들이 지쳐갈 즈음이면 엄마는 새로운 과제를 제시했다. 이제부터는 떡볶이용과 구워 먹을 용도의 떡으로 썰라는 것, 이것은 우리들에게는 정말 구원의 말이었다. 무엇보다도 쉽게 떡 썰기를 마무리할 수 있으며, 우리가 좋아하는 매콤한 떡볶이를 먹을 수 있다는 기대감과 화로에서 구워질 가래떡의 바삭하고 고소한 맛에 대한 기대감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떡을 썰어서인가, 힘이 제대로 주어지지 않고 갈수록 떡의 모양이 흐트러진다. 떡국은 이 정도면 되겠지라고 스스로 설득하며 예전처럼 떡볶이용 떡도 마련하고, 구워 먹을 가래떡도 마련했다.
그런데 문득 이런 내 모습이 신기하게 느껴진다. 옆에서 시키는 것도 아닌데 나는 엄마가 했던 것처럼 가래떡을 즐기고 있다. 예전의 기억이, 엄마의 삶이 나의 삶을 끌어가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은 행동만이 아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예전에 엄마가 하던 말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는 경우도 있다. 일부러 기억하지 않았는데도 엄마와, 할머니와 닮은 꼴로 살고 있다. 어느 때는 예전에 먹었던 음식, 예전에 했던 것들을 그리워하며 찾아다니기도 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 그들의 삶의 방식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엄마 꼭 할머니 같아'
간혹 딸아이가 하는 말이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말이기도 하고, 저희와 다르다는 말이기도 하기에 발끈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오늘은 그 말을 순하게 받아들이기로 한다.
추억이 달콤한 건 이미 살아낸 삶이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렇게 '현실'에 툭 튀어나올 때, 편안하게 살아낼 수 있기 때문임을 생각하게 된다. '지나간 일'로 끝나지 않고 편안하게 따라가게 되는 삶의 발자취.
오늘 나는 떡을 썰면서 예전의 삶을 다시 살았다. 내 안의 과거와 현재가 자연스럽게 만났다. 나의 나이 듦에 다시 걸어오는 추억이 따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