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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리야 May 03. 2024

소설을 쓰고 나니 출판을 해보자

나는 소아병동 터줏대감입니다 출간기


소설을 종이책으로 출간한 지 

일주일이 안 되는 시점인 지난주 유통 대행사에서 연락이 왔다.

기쁜 소식이라고 했다. 

책이 거의 다 팔렸으니 추가 인쇄를 할지 

이대로 절판을 할지 결정해 달란 전화였다.

책을 출간일에 맞춰 주문했다던 지인들이

 왜 배송이 안되냐고 연락이 와서 당황했건만

이제야 그 이유를 알게 됐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누가 내 책을 샀을까.

초보 작가는 모든 것이 궁금하기만 하다.


일주일도 안된 시점에 벌써?

 감사하고 또 감사한 일이지만

 소량을 출판하면서도 다 팔릴 거란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자비 출판을 하다 보니

 전자책만 출간하고 말까 하다 

주변에 책이 나옴 

사서 보고 싶단 지인들이 있어

 딱 100권만 출간한 것이다.

지나가던 베스트셀러 작가들이 

이 이야기를 들으면

 웃을 수도 있는 소량의 책이건만

초보 작가에게 모든 것이 감사한 상황이었다. 

어차피 내 목적은

 책으로 돈을 벌자도 아니었고

책을 널리 알려보잔 생각도 아니었다.

물론 전자는 아직도 변함이 없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 책이 나올 무렵 

아무도 안 읽어주면 그건 참 슬프겠구나... 

하는 생각에 

어느 정도는 책이 나왔단 것을

 알릴 필요는 있단 생각으로

 바뀌었지만 말이다. 

유통사의 전화에 고민을 하다 

결국 난 추가 인쇄를 결정했다. 


첫째, 부족한 내 책을 사서

 정성스레 읽어주는 사람들이 고마웠고

 둘째, 주문을 했는데 왜 배송이 함흥차사냐고

 연락 오는 지인들에게 미안했다.

그리고 셋째, 결정적으로 이 책은

 내 아이의 투병기간, 

나와 아이를 지켜줬던 

일종의 간절한 기도문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소아병동 터줏대감입니다.”라는 책을 읽는 독자들이, 

보이지 않는 터널 속에서

 나와 같이 단 하나의 빛줄기를 찾고 있다면

 그 빛이 꼭 나타날 것임에

 함께 힘을 내길 바랐기 때문이다.  

   

cㅐㄱ

어제 아이 학교에서 사진 찍기 수업이 있다며 

사진기를 준비물로 챙겨갔다.

인터넷 주문을 잘못해서

 4살짜리가 가지고 놀만한

 장난감 사진기를 가져간 아이는

 그래도 뭐가 좋았는지

 학교에서 수많은 사진을 찍어왔다.

 담임 선생님은 학교앱에 숙제를 올리셨다. 

하트 모양으로 잘라낸 종이를 

액자처럼 카메라 앞에 대고

 꽃과 나무, 자연을 찍은 예시를 올린 후

 아이들이 수업 시간 밖에 나가 찍은 

하트 액자프레임의 자연 사진을 전송해 달라 하셨다.



과연 우리 아이는 

하트 종이액자 프레임의 원리를 이해하고

 제대로 된 사진을 찍었을까. 

궁금 반 설렘 반의 감정으로 퇴근길을 날아

 아이 가방 주머니의 카메라부터 꺼내 들었다. 

역시 선생님의 예시와 같은

 정확한 정답의 사진은 없었다. 

그런데 문득 아이의 시선으로 본 세상이 너무 생경하고 재미있었다. 

땅 밖을 나온 작은 개미가

 신이 나 학교 운동장을 질주하면서

 온갖 만물을 느끼는 듯한 귀엽고도 창의적인 일상이었다. 

얼마나 여러 번 셔터를 누른 건지

 학교 운동장의 온갖 풀과 나무, 바닥,

 심지어 벽까지 학교 안 모든 삼라만상이 

작은 사진기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러던 중 몇몇 사진들에 시선이 멈췄다. 

파란 하늘이 있었고 밑에서 올려다본

 학교 외벽 옥상이 보였다.

 순간 시간이 멈췄다. 

작은 사진기를 눈에 대고 

하늘과 학교를 바라보고 있는 내 아이의 모습이 

영화처럼 그려졌다.

 더할 나위 없는 

평화와 숨결이 느껴지는 사진이었다.      

대학에서 사진과 영상 강의를 하고 있기에

 그 사진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더욱 알 수 있었다.

 롤랑 바르트가 “카메라 루시다”에서 언급한 “푼크툼” 

사진을 보는 사람의 개인적 경험에 비추어

 “찌를 듯한 그 무언가의 느낌”으로

 특별하게 다가오는 사진의 느낌. 

그 사진은 사회적으로 공유되는

 공통된 느낌을 갖는 “스투디움”을 넘어선 

특별한 그 무엇으로 내게 다가왔다.     


사진을 찍는 아이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콧노래를 부르며 

신나게 학교의 구석구석을 담으며

 쉴 새 없이

 학교를 찍어대고 있는 아이의 모습에

 순간 학교의 벽돌 외벽이 들어왔고

 파란 하늘이 들어왔다. 

파란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쨍한

 햇살이 내리쬐고, 

눈부신 것을 잘 보지 못하는 아이는

 순간 눈을 감았으리라. 

눈을 비비고 다시 집중해 

하늘을 바라본 아이는 

카메라를 위로 들어

 학교와 하늘을 찰칵 담았을 것이다. 

여전히 눈이 부신 아이의 깜빡임에

 사진은 순간 흔들려 

청명한 하늘은 초점을 잃어버린다. 

학교에 돌아가 

행복한 일상을 맞이하고 있는

 아이의 봄날이

 사진기에 듬뿍 담겼다.    

 


작년 아이는

 병원에서 8번의 흉부외과 수술을 했다.

어른도 견디기 힘든 수차례 수술을 하며

 수술실에 들어가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일상을 겪으며

 아이와 난

 병실 창문에서 보이는 바깥세상의 하늘을 동경했다. 

문득 아이와 병실 하늘을 날고 있는

 기러기를 본 적이 있다. 

브이자를 그리며 어디론가 자유롭게 날고 있는

 가족 같은 새무리들을 바라보며

 아이와 난

 소아병동을 나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상태가 조금 나아지는 날이면 

병원 정원에 나가 햇살을 쬐면서

 매일 보는 병원의 외벽을 바라보았다. 

외벽 위로 펼쳐진 하늘은 저렇게 푸르른데 

휠체어에 앉아

 또는 폴대와 각종 장치를 몸에 지니고 

겨우 걸음걸음을 내딛는 아이와 함께 보는 하늘은

 왜 그리도 높아 보이는지.      


사진 찍기가 취미이며 직업병인 나는

 항상 수없이 사진을 찍어 현장을 기억하고, 

표현하는 걸 좋아했다. 

병원에 있는 순간에도

 나의 사진 찍기는 멈추지 않았다.

 입원 기간 찍은 사진 중

 아이가 없는 사진은 단 한 컷도 없었다.

 아이가 아픈 순간에도 사진을 찍는 마음...

 이 고통의 시간 또한 지나가리라. 

이 순간 또한 과거가 되어

 언젠가 과거를 회상하며

 이 사진을 볼 수 있기를. 

간절한 마음이 만들어낸 순간들이었다. 

긴 터널이 끝이 보이던 그날, 

아이가 퇴원하고

 처음으로 난 아이가 존재하지 않는

 일상의 사진들도 찍기 시작했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하늘을 찍고

 일상을 찍기 시작했다. 

그제야 아이가 아닌, 

세상의 다른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늘을 찍고, 학교를 찍은 아이의 사진이

 그래서 내겐 특별했다.

 고마웠다. 

일상으로 돌아와 주변을 둘러보게 된 아이가 

이제 다른 아이들처럼 

평범한 학교 생활을 보내게 된 것이다. 

하늘과 학교를 찍은 아이의 사진이 내게 말을 걸고 있었다.

 “엄마, 나 이제 괜찮아.”


감사하단 말 이외에 어떠한 말이 내 마음을 표현할 수 있을까. 

고마워. 힘든 시간을 이겨내 줘서. 

그리고 씩씩하게 일상으로 돌아와 줘서...

아이는 8번의 수술 후

 가슴을 관통하는 

수많은 수술 절개 자국을 갖게 되었다. 

평생 탈의를 할 수 없을 크고 흉한 상처이고,

 수술 이후 다시 흉곽이 함몰되어 

심장과 폐를 압박하고 있기에 

끝나지 않을 재활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럼에도 나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매일 감사함을 되뇌인다.

 살아 있음에... 


태어날 때부터 수술을 해야 할 몸을 준 

엄마로서의 죄책감에 대해

 한 선배와 얘기하던 어느 날

 선배는 내게 그건 결코 부모의 잘못이 아니니

 죄책감을 내려놓으라 했다.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아이의 상처가 가슴에 남아있음에도

 그것이 가능할까...

하늘을 보고 힘을 내고 

씩씩한 일상을 살아가는 위대한 꼬마. 

부모보다 강한 아이를 통해 난 매일 삶을 배운다. 

전혀 괜찮지가 않는 내게 

항상 괜찮다는 말을 해주는 

어른 같은 나의 아이.  

    


일찍 철이 들어 바쁜 엄마를 찾지 않던 아이가

 어젯밤 갑자기

 브람스의 자장가를 들으며 잠들고 싶단 말을 했다. 

9년 만에 처음으로

 자장가를 듣고 자고 싶단 아이의 말이었다. 

마음이 쿵했다. 왜일까. 

평소와 다른 아이의 모습에 만감이 교차했다.

 생각해 보니

 그 흔한 자장가를 어릴 때도 몇 번 불러준 적 없고

 CD 자장가를 틀어주면서 

아이를 재운 적도 없는 빵점자리 엄마였기에

 9살이 된 아이가

 자장가를 틀어달란 말의 행간이 궁금했다.

 아이는 내게 말했다. 

“엄마, 어른들을 위한 브람스의 자장가를 틀어주세요.”


어른들을 위한 자장가...?

 아이는 어른들을 위한 자장가를 틀어달라고 말했다.

 어른이 되고 싶은 아이의 주문인 건지, 

어른인 엄마를 위한 위로의 선곡인 건지

 더 자세한 건 묻지 않았다. 

아이는 말없이 음악을 들으며 

갓난아기처럼 행복하게 눈을 꼭 감고 있었다. 

불 꺼진 침실에 누워 처음으로

 부쩍 자라 버린 아이와

 브람스의 자장가를 들었다. 

잊고 있었던 현실의 평화였다.   

앞으로 어떠한 미래가 

또다시 우리에게 밀어닥칠지 알 수 없지만

어른들을 위한 자장가 소리에

아이는 어느새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잠이 들었다. 


   



 “Happiness makes up height for what it lacks in length.”

“모자라는 부분을 채워가는 것이 행복이다.”

로버트 프로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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