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소아병동 터줏대감입니다.> 출간기
"소설이라는 것은
원래 건강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아무래도 그런 면도 있다고 답할 것 같아요.
건강하지 못한 요소,
즉 독과 같은 치명적인 부분이 담기지 않으면
소설이 될 수 없잖아요.
그 독소를 꺼내서 제거하려면
몸 자체가 건강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독성 물질’에 버텨낼 재간이 없어요.
혹은 내 속에 있는 맹수를 유인해 낸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르겠네요.
어쨌거나 그런 때에도 체력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맹수의 밥이 되고 말 테니까요."
사이토 다카시의 책
<일류의 조건>에 나오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인터뷰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예전에 하루에 담배 60개비씩을 피워대던
헤비 스모커였으나
금연을 결심하면서 달리기를 시작했다고 한다.
소설을 쓰기 위한
체력과 인내심을 키우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고
건강한 육체에
좋은 글이 나올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라 했다.
<일류의 조건>에서 작가 사이토 다카시는
프랑스 소설가 발자크나 스토이 같은 작가를
예로 들며
이들은 병약하고
선이 가는 타입의 작가가 아니라,
아주 건강하고 호쾌한 타입의 작가였으며,
단단한 신체를 기반으로
꾸준한 작품 활동을 했음을 강조한다.
이는 독일의 대문호인 괴테도 마찬가지이며
괴테 역시 고대 작품들이 뛰어난 이유로
건강하고 단단한 점을 들었다.
신체적 정신적으로도 건강하고 단단하기 때문에
크고 깊은 슬픔도 건강하게 소화하여
있는 그대로 그려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내가 <나는 소아병동 터줏대감입니다>라는
소설을 쓴 시기는
인생에 가장 큰 시련이라고 할 수 있는,
나의 정신과 몸이
가장 건강하지 못한 순간이었다.
일적으로나 아이의 입원 생활이나
햇빛 하나 들지 않는
짙은 암막 커튼이 드리워진 날들.
달리던 삶에 쉼표를 찍으며,
반복되는 소아병동의 낮과 밤이 흐르고 있었다.
병원에서 마주치는 생과 사의 순간들.
예고 없이 병동을 울리는 코드블루 소리...
병원에 오래 입원하다 보면
저절로 알게 되는 병동 번호...
한 번은 소아병동에 자리가 없어
성인 병동에 입원한 적이 있었다.
우리 옆 병실은 음압 장치가 있는 1인실이었다.
병실은 이중문이었고,
의료진과 병원 관계자들이 옆 병실을 가기 위해서는
코로나 때 볼 수 있는
이중 삼중의 비닐 보호 장비들을
갖추고 들어가야만 했다.
옆 병실의 문이 열릴 때마다
나도 모르게 신경이 곤두섰고,
잦은 수술로 면역력이 약해질 대로 약해진 아이가
행여나 호흡기 감염이 될까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는 것마저 조심스러웠다.
자리가 생겨 소아병동으로 옮기기 전까지
옆 병실은 나의 꽤나 큰 관심을 받았고
이상하게도 옆 병실에선
어떠한 말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어느 날 밤이었다.
소등을 하기엔 이른 초저녁,
정신을 번쩍 차리게 하는
코드블루 소리가 병동에 울려 퍼졌고,
코드블루는 **병동, **병실을 불러대고 있었다.
저녁노을이 지던 어느 날.
유난히도 붉게 하늘이 물들던 그날,
옆 병실의 누군가를 위한 코드블루였다.
갑자기 아이스버킷을 던진 것처럼
아이는 얼었고,
이내 귀신처럼 알아차렸다.
옆방 누군가.
우리끼리는 아마도 할아버지일 것이라 추정했던
옆방의 환자가 위급하다는 걸.
병동이 분주해졌다.
작은 소리도 들리지 않던 옆 병실에
사람들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이는 온 신경을 곤두세워 옆방의 소리를 들었다.
아이가 듣지 않길 바라며
난 장기 채널의 볼륨을 올렸다.
장기대국이 시작할 때면 모든 걸 멈추고
항상 열정적으로 집중해 보던 아이가
웬일로 리모컨을 들어 TV를 껐다.
말없이 옆 방 소리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옆방에서 생경한 울부짖음 소리가 들려왔다.
멈추지 않는 울부짖음이
늦은 밤 병동에 울려 퍼졌다.
잠도 자지 않은 채
옆방 할아버지는 괜찮은 거냐고 묻던 아이가
입을 닫았다.
짙은 어둠이 병실을 가득 채웠다.
난 할아버지가
천국에 가신 것 같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아이를 안아주었다.
그날 아이는 늦게까지 잠들지 못했다.
나 역시 잠들지 못했다.
꽤나 오래 들렸던 울음소리가
병동에 울려 퍼졌을 때,
소리를 들은 병동의 모든 사람들은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 슬픔이 나의 차례가 되어 오지 않기를...
며칠 전 아이의 크록스를 새로 샀다.
작년 병원에서 매일 함께했던 얼룩무늬 크록스.
수술실을 들어갈 때마다
비닐봉지에 쌓여 내 품에 있었던 크록스가
벌써 작아진 느낌이었다.
작은 발로 병원 곳곳을 누비던
아이의 발걸음이 잊혀지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불편하긴 해도
좀 작은 상태로 한해 더 신길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젠 불편한 크록스가 아닌,
편한 새 신발을 사주고 싶었다.
새로운 신발을 신을 때가 온 것이다.
소설을 다 쓴 후 결국 출판사를 차렸다.
고심 끝에 출판사 이름을
“도서출판 라파엘”로 정했다.
아이 이름을 건 출판사에서
소설을 출간하고 싶었다.
아이의 영어 이름은 라파엘이다.
라파엘은 성경에 나오는 “치유천사”이다.
아이 영어 이름을 라파엘로 정한 5살 무렵.
교회 유치원을 다니게 된 아이가
“치유천사 라파엘”이 되어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또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며
누군가의 마음을 보듬어주는
사람이 되길 바랐다.
그런 내 마음을 알았던 걸까.
신기하게도 아이는 유치원 졸업식 날
커서 어떤 사람이 되고 싶냐는 원장님의 질문에
마이크를 꼭 쥔 채 큰 소리로 말했다.
“저는 사랑을 나눠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전혀 예상치 못한 답이었다.
마음이 쿵 했다.
새로운 신발을 신을 때가 온 것처럼
출판사를 차렸고 소설을 출간했다.
“어제는 어젯밤에 끝났다.
오늘은 새로운 시작이다.”
노먼 V 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