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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빛 Feb 01. 2024

한겨울에 듣는 늦여름의 더운 바람

김동률, <여름의 끝자락>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나는 가을을 가장 좋아하고, 그다음으로 봄, 겨울, 여름 순으로 선호한다. 그래서 나는 무덥고 모기천국인 여름이 지나고 이제 내가 좋아하는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 다가오는 늦여름부터 신이 난다. 늦여름이라 하면 9월을 꼽을 수 있는데, 34도를 웃도는 한여름을 지나 28~29도 정도로 내려가기 시작하는 시기이다. 낮에는 다가오는 가을바람을 닮은, 아직은 더운 바람이 불고, 밤에는 조금씩 선선해져 자꾸만 바깥 산책을 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 시기이다. 

    요즘 추위에 익숙해지다 보니 반대로 더위에 몸이 이완되는 여름을 떠올리게 된다. 이 노래를 들으면 늦여름, 오후 2, 3시쯤 음악실 창문을 모두 열고 더운 바람을 맞으며 피아노를 치던 순간이 떠오른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매년 9월쯤이면 이 노래를 많이 듣는데, 유독 그 순간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김동률, <여름의 끝자락> (음악 듣기)


    빈 수업시간에 나는 주로 교무실에서 담임, 행정업무를 하거나 음악실에서 수업 준비와 음악실 정리를 한다. 그날도 여느 때와 같이 음악실에서 혼자 사부작사부작 거리며 일을 하다가 피아노 반주 연습을 했다. 운동장을 바라보는 창문 아래 피아노가 있는데, 피아노를 치며 운동장에서 체육수업을 하는 학생들을 구경하곤 했다. 음대에 다니다 보면 학교 연습실에서 피아노 연습을 오랜 시간 할 일이 많은데, 연습을 하다 지치면 옆방 피아노 의자를 가져와 길게 붙여 누워 쪽잠을 자는 것이 다반사였다. 학교 일을 하면서 학생들에게 부대껴 숨을 돌리고 싶은 순간이 오면 음악실에서 혼자 피아노로 이 곡과 같은 느긋한 음악을 연습하다가 대학생 때처럼 의자에 누워 잠시 쉬곤 했다. 

    이 곡에는 여름의 무더위와 삶에 지쳐 힘든 나에게 가을이 살며시 내미는 손과 같은 음악이다. 3박자의 왈츠 리듬이 느긋하고 여유 있는 분위기를 풍기고 김동률의 굵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짙은 흙색의 음색을 내어 마음을 포근하게 한다. 부드러운 피아노는 마치 늦여름의 더운 바람을 흉내 내는 듯 살랑거리며 흔들거린다. 피아노가 반주치 고는 개성 있으면서도 듣기 좋은 것이, 궁금해서 찾아보니 피아니스트 김정원이 연주한 것이었다. 그의 연주는 마치 쇼팽의 녹턴과 같이 박자와 강약을 밀고 당기며 부드러운 머랭을 먹는 듯한 달콤함을 선사한다. 

    이 노래를 봄이나 한여름에 들으면 조금 답답한 면이 있다. 그래서 나는 이 노래를 딱 늦여름과 추위가 지겨워질 때쯤의 한겨울의 끝에 듣는다. 마치 여름에 수박을 먹는 것과 한겨울에 수박이 그리워져 냉동 수박주스를 사 먹는 것과 유사하다. 

    오랜 시간 동안 이 노래를 듣는 것은 아마 유행과 장르를 뛰어넘은 명곡이기 때문이지 싶다. 합창곡, 한국가곡으로 편곡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대중음악과 클래식 사이의 분위기, 튼튼한 구조와 기승전결이 확실하고 설득력 있는 선율의 흐름, 김동률과 김정원의 개성이 확실하지만 듣기 좋은 연주. 이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어 이 곡을 완성한다. 과한 찬사라 여겨질 수 있겠지만, 대가의 것은 최고로 단순하다는 말처럼, 소박하고 단아한 이 노래는 김동률이 이제껏 쌓아 올린 음악 세계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오늘은 이 노래를 들으며 추위에 길든 내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본다. 그리고 다가올 늦은 여름날 오후의 여유로운 공기를 기대하며 미소 짓는다. 


김동률, <여름의 끝자락> (뮤직비디오 감상)


2019년 8월 20일에 발매된 음원으로, 앨범 재킷에 이 곡의 분위기를 잘 담았다. 김동률은 음악으로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 시간과 공간의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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