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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을 끊어야 할 때...

필요로 하지 않을 때는,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면 됩니다(D-321)

갑자기 날씨가 추워지거나 눈이 오면, 점심 식사 후 밖으로 운동을 나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면 회사 내 빈 공간을 활용하거나, 아니면 계단이나 복도를 이용하여 실내운동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행히 본사에 비해 회의실도 여유가 좀 있고, 외부에 산책할 수 있는 곳도 있으니 천만다행이지요.


저도 본사에서 생활을 해봤지만, 한정된 공간에 많은 인원이 모여 있다 보니 답답할 때가 너무 많았습니다. 가끔 차를 타고 가다 보면 보이는 서울동부구치소를 '빌딩형 교도소'라고 하던데, 그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럼 안에 있는 '임원은 교도관'이고, '직원은 수감자'인가요? 아님 둘 다 수감자일 수도 있네요.



이미 정년퇴직하신 선배, 저와 같이 올해 정년퇴직하는 동기, 그리고 아직은 현업으로 5년 이상은 일을 해야 할 후배들이 함께 모여 술 한잔 하는 정기모임에 참석했습니다. 구성원을 보면 전부 해외 주재원, 팀장, 실장을 했었거나 현재형인 사람들의 모임이네요. 주로 오고 가는 이야기는 퇴직 전 준비할 일은 무엇이고, 퇴직 후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후배사원에 대한 코칭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어떤 분은 낼 모래 회사를 관둘 사람이, 왜 아직도 회사 일에 신경을 쓰냐고 합니다. 그냥 조용히 있는 게 도움이 되는 것인데, 굳이 나서서 '배 나와라 감 나와라'하지 말라는 겁니다. 우리가 나서지 않아도 알아서 잘 돌아갈 것이고, 조언을 빙자한 간섭을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어떤 분은 그래도 후배사원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측면에서, 시간이 되면 가지고 있는 노하우를 전수해 주면 좋지 않겠냐는 사람도 있습니다.


조용하게 가만히 있는 것이 맞는지, 아니면 끝까지 업무에 참견을 해야 하는 것이 맞는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리고 저녁모임은 끝났습니다.


먼저 정년퇴직을 하신 선배분들을 돌이켜 생각해 보니, 조용하게 가만히 지내시다가 퇴직하신 분들이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저 역시 남은 기간 동안 특별한 일이 아니면, 신경을 끊고 살아야겠다는 쪽으로 마음을 먹기는 했습니다.


신경 쓰이는 것이...

얼마 전부터 눈에 거슬리는 것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대회의실의 방송장비였습니다.

항상 하단 전원공급 장치에 '220V 전원 공급 표시등'이 켜져 있어야 하는데, 며칠 째 계속 꺼져 있더군요.

제가 팀장 시절에 약 17억 원의 비용과 6개월 간의 노력으로, 이전한 현재의 사무실입니다. 웬만한 시설과 장비의 구매부터 설치까지, 정말 한 땀 한 땀 정성이 들어간 곳이지요. 그래서 많은 애착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사소한 문제라도 있다는 것을 보면 마음 한편이 아립니다.


아마 사무실 재배치로 인한 공사가 진행되면서, 대회의실 방송장비의 전원 공급이 중단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방송장비에 전원 공급이 안되면, 천정에 설치한 빔 프로젝트뿐 아니라 전동 스크린도 작동이 안 됩니다. 당연히 음향장치인 무선 마이크도 작동이 안 되고요. 그래도 곧 사무실 공사가 끝나서 전원 공급이 재게 되면, 문제는 바로 해결될 것이라 걱정은 안 했습니다.



얼마 후 대회의실 앞을 지나다 보니, 곧 협력업체와 회의가 있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네요.

그런데 지금과 같이 전원공급이 안되면, 대회의실에서는 회의 진행이 안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몇몇 직원에게 "방송장비의 전원이 차단되었으니, 한번 확인해 보라. 아마 공사로 인한 문제 같다"라고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며칠을 지켜보았는데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았고, 조치도 이루어지지 않더군요.

가만히 있을 걸 괜히 이야기했나 하는 생각도 들고, 나라도 가서 이야기할까 하는 생각도 잠시 들더군요.


회의 당일 대회의실 안에서 빔 프로젝트와 마이크가 작동이 안 된다는 소리가 들립니다.

급하게 팀장이 팀원에게 지시를 했고, 공사업체가 전원을 연결하면서 회의에는 지장이 없었습니다.


제가 이야기했었을 때는 별다른 조치나 움직임이 없었는데...

팀장이 지시하니 바로 움직이는 것을 보고, 씁쓸한 생각이 들며 헛웃음이 나옵니다.



"간혹 나 없으면 안 돼!"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자리에서 빠지게 되면, 또 다른 누군가가 그 자리를 메꿉니다.

비록 완벽하거나 더 잘하지 못하고, 부족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한 사람이 빠진다고, 조직 전체가 붕괴되지는 않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조직은 마치 유기체인 것과 같아 살아서 움직입니다.

마구 증식하여 덩치가 커지기도 하고, 분열되어 둘로 나누어지기도 하고, 외부 침입으로 사멸하기도 합니다.

아무리 큰 상처도 어느덧 아물고, 새 살이 돋아납니다.

비록 흉터가 남을 수는 있지만요.


누군가 내가 필요하다고 도움을 요청하면, 그때는 적극적으로 조언하고 도와줄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저를 필요하지 않는다면, 조용히 뒤에서 지켜보며 응원만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아닐까 합니다.


오늘도 펭귄의 짧디 짧은 다리로 달리고 달리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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