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소모를 막기 위해 불필요한 전화번호는 지워볼까

즐거운 고독 만들기 12 (마지막 회)

실장에서 물러나니 갑자기 한가해졌습니다.

매일 출근하자마자 PC를 켜고 회사 사이트에 접속하여 e-메일을 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업무 진행사항을 점검하고, 보고서 확인 및 해당 업무 담당자와 미팅, 각종 회의에 참석하는 등 하루가 바쁘게 흘러갔습니다. 진짜 바쁠 때는 사무실뿐 아니라 집에서도 계속 회사 사이트를 통해 업무를 진행하기도 했고요. 그러다 보직에서 갑자기 내려오게 되니 한가하다 못해 따분하게 느껴집니다.



전화가 와도 예전과 달리 업무와 연관된 전화는 거의 없고, 어떻게 전화번호를 알았는지 부동산이나 보험사 또는 대출 관련 전화만 옵니다. 이렇게 한동안 지속되다 보니 모르는 전화번호는 아예 받지 않는 나름의 습관도 생겼습니다.


문득 생각이 나서 스마트 폰에 저장된 전화번호를 보니 약 500개 정도가 있네요. 대부분 회사 임원들이나 직원들 전화번호, 그리고 업무적으로 알게 된 협력사 등 외부 업체의 임직원 전화번호입니다. 그 외에도 가족, 친인척, 학교 동창, 병원, 부동산 중개사, 심지어는 회사 인근의 식당 전화번호도 있습니다. 아마 당시에는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이나 가게 전화번호를 입력했던 것 같습니다.

전화번호를 하나씩 내려가면서 보니, 누구인지는 알겠지만 지금은 뭐하는지 모르는 오랜 전 알았던 사람 또는 기억조차도 나지 않는 사람까지 있었습니다.

아마 이런 사람들은 제 이름을 보고, 저와 동일한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하네요.


그래서 한번 정리를 하기로 했습니다.

하나씩 이름을 보면서 지워가다 보니 혹시나 나중에 연락이 올 수 있어서 남겨두고, 반대로 내가 혹시 연락일이 생길 수 있어서 남겨두다 보니 한 30% 정도만 지워졌습니다. 일단은 현재의 상태로 놔둔 후 구글 캘린더(Goole Calendar)에 한 달 후 '전화번호 정리'라고 입력을 했습니다. 만약 한 달 뒤에도 별 변화가 없다면 추가로 더 전화번호를 삭제할 계획이었습니다.

한 달 후 캘린더 알림에 '전화번호 정리'가 뜨길래, 한번 더 스마트 폰에 저장된 전화번호를 쭉 훑어봤습니다. 역시 전혀 연락이 오거나, 혹은 제가 전화할 일이 없는 전화번호가 태반이네요.


다시 한번 더 정리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202개만 남았네요.

정확하지는 않지만 약 37% 정도만 남은 것이니, 63%는 쓸모없는 전화번호였던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지금까지 비즈니스로 이루어진 가짜(?) 인맥이 정년퇴직 후 대부분 사라지면, 10% 이하만 필요한 전화번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정년퇴직 후 한 6개월 뒤에 정리하면 정말 필요한 전화번호만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뿔싸!

그런데 갑자기 010으로 시작하는 전화번호 하나가 뜹니다.

당연히 전화하는 사람의 이름이 안 뜨니 전화를 안 받고 있었는데, 그날따라 오랫동안 끊어지지 않아 한번 받아봤습니다. 사실 지난번에 주차한 제 차를 누가 부딪친 후 전화한 적도 있어서, 혹시나 해서 받은 것이지요.


"여보세요"했더니, 바로 "잘 지내냐?" 하는 목소리가 들립니다.

'어! 처음부터 반말? 많이 듣기는 한 목소리인데'라고 생각은 했지만, 확실히 누구인지는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실례지만 누구세요?"라고 하니, 바로 "나 ○○야. 너 내 전화번호 지웠구나"하는데 순간 당황했습니다.


오랫동안 같은 조직에서 일했고, 지금은 퇴직하신 임원이었습니다. 제가 얼마 전에 연락할 일이 없을 것 같아서 지웠던 사람 중 한 명이네요. 얼떨결에 "휴대폰 교체 후 일부 전화번호가 누락되어서 잘 몰랐습니다"라고 하고 넘어갔지만, 예전부터 엄청 눈치가 빠른 분이었기 때문에 전화번호를 지운걸 이미 알고 있었을 겁니다.

당연히 그냥 안부 차 전화를 했을 리는 없고, 뭔가 필요한 것이 있어서 전화를 한 것이지요. 이제 원하는 바를 얻었으니, 남은 시간 동안은 예전 추억과 같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만 하다가 끊었습니다.



저장된 전화번호 중 불필요한 것을 모두 지우는 일은, 정말로 정년퇴직 후 6개월 정도가 지난 후 실행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2번 정도 정리를 하면서 지웠으니, 당장 불필요한 전화로 인한 신경 쓰임은 적어지지 않았나 합니다.

직장 생활을 33년 넘게 하다 보니 비즈니스 관계로 엮인 사이가 꽤 많더군요. 그런데 정년퇴직 후에는 그런 관계가 계속 이어질 리가 만무할 것 같습니다. 저 만해도 전임 실장님한테 안부 전화 한 게 벌써 2년이 넘었네요.


불필요한 인간관계를 계속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에너지의 낭비'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정년퇴직 후에는 과감히 불필요한 과거의 관계로부터 멀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 일환 중 하나가 불필요한 전화번호의 삭제가 아닐까 하네요.


이번 글을 마지막으로 '즐거운 고독 만들기'는 마치려고 합니다.

제가 쓴 글에 대해 읽어보고, 생각을 정리하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오늘도 펭귄의 짧디 짧은 다리로 달리고 달리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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