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유아건강검진 (Well Child Visit) 7년 차
한때 한국에서 화제가 됐던 뉴스입니다. 소아과 의사가 청진을 하기 위해 5세 여아의 상의를 걷어 올리다 아이 엄마가 의사에게 ‘애가 가슴이 나오는 시기라 예민한데 왜 그랬냐’면서 소리 지르고 화를 냈다는 이야기였는데요 [1]. 모든 부모가 다 이런 게 아니라 드물게 이런 사건이 일어나기 때문에 화제가 됐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 자체가 의사와 환자 사이의 신뢰관계, 혹은 라포 (rapport)가 시간이 갈수록 깨지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아 참 안타깝습니다.
이 라포라는 것은 의사와 환자의 관계가 특수하기 때문에 더욱 중요합니다. 의사는 환자의 상태를 정확하게 판단하기 위해서 다소 민감한 내용에 대해 문진과 신체진찰을 해야 하고, 이는 환자가 의사를 신뢰를 해야 가능한 일이죠. 한국은 진료비가 워낙 낮게 책정돼 있어 의사가 어쩔 수 없이 수많은 환자를 제한된 시간 안에 봐야 하고, 그러다 보니 "3분 진료" 이상으로 환자와 시간을 보내기가 어렵고, 결과적으로 환자와 라포를 쌓을 기회가 많이 없습니다.
한국 3분 진료 vs 미국 20분 진료
반면 미국에선 소아과 진료시간이 보통 15분-20분 사이로 좀 더 여유가 있는 편입니다. 그래서 진료 이야기 이외에 짧은 잡담(small talk)을 하면서 라포를 쌓을 기회도 있고, 신체진찰을 할 때 왜 이 진찰이 필요한지 설명할 시간과 허락을 받을 시간도 있습니다. 미국에서도 생식기 진찰은 민감한 부분이라 이런 설명과 허락을 반드시 받고 진행해야 하고, 오해가 생길 경우 제삼자인 증인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간호사를 방 안에 들어오게 합니다(이 역할을 chaperone이라고 부릅니다). 다소 번거롭지만, 이런 민감한 신체진찰이 특히 중요한 나이대가 있기 때문에 꼭 짚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입니다.
8살 이전에 가슴이 발달하면 비정상
7살은 여아의 가슴 진찰 소견이 제일 중요한 나이입니다. 가슴 발달은 여아 2차 성징의 첫 증상인데, 8세 이전에 가슴이 발달하기 시작하면 성조숙증이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죠. 가슴 발달의 첫 단계는 젖꼭지 아래에 조그만 유방조직 (breast bud)가 생기는 것인데, 눈으로 볼 때는 정확히 구분을 하기 어렵기 때문에 손으로 직접 문질러 보면서 촉진을 해야 합니다. 대체로 10살부터 가슴 발달이 시작하고, 그로부터 몇 개월 후 생식기 주변에 털이 생기고, 11살부터 키가 엄청 빠르게 자라게 된 후, 13살에 월경을 시작하는 것이 전형적인 여아의 2차 성징 과정입니다.
다인종 국가인 미국에서 특별히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은, 인종에 따라서 2차 성징 발현이 다를 수 있다는 점입니다. 7살 여아 중 백인의 경우 10%, 흑인의 경우 무려 25%가 가슴 발달이 이미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3]. 그래서 흑인의 경우 이런 2차 성징이 발견되어도 실제로 성조숙증이 아닐 경우가 높고, 이에 대해 부모를 안심시켜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옛날에 "먼 나라 이웃나라"를 재밌게 읽었던 시절이 있었는데, 게르만계인 독일 여자들보다 라틴계인 프랑스에서 보통 사춘기가 빨리 일어난다고 읽었던 게 기억이 납니다. 인종에 따라서 사춘기도 다른 나이에 오는 걸까요?
사실 성조숙증이 엄청 흔한 질환은 아니어서, 이런 진찰을 꼭 해야 하는지 의문이 충분히 들 수 있습니다. 얼마나 흔한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여아에서는 대략 0.1%의 확률로 일어난다고 하고, 여아가 남아에 비해 성조숙증이 있을 확률이 10배이기 때문에, 남아에서는 찾아보기 정말 어려운 질환입니다 [2]. 성조숙증이 흔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진찰을 하는 이유는, 조기에 진단하지 못할 경우 아이의 최종 키가 작아지는 비가역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성조숙증이 있으면 실제 나이에 비해 뼈나이가 더 빠르게 돼서 초반에는 오히려 또래아이들에 비해 키가 크지만, 성장판이 너무 일찍 닫혀버리게 됩니다.
또한 성조숙증은 꽤나 복잡한 질환입니다. 우선 진성 성조숙증과 가성 성조숙증으로 나뉘고, 기본적 뼈나이 검사와 호르몬 수치 이외에 뇌영상 검사나 유전자 검사가 필요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일단 의심이 되면 일반 소아과에서는 추가적 진단과 치료가 어렵고 소아내분비과로 의뢰를 하게 됩니다. 따라서 일반 소아과의 역할은 꼼꼼한 문진과 신체진찰을 통해 성조숙증의 조기 신호를 발견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특히나 성조숙증이 그렇게 흔한 질환이 아닌 만큼 놓치기도 쉽기 때문에, 정기적인 건강검진을 통해 소아과 의사의 진료를 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 6세 이후의 건강검진은 학생검진으로 이루어지는데, 많은 경우 학교 체육관에서 집단 검진 형태로 진행이 됩니다. 총 4회, 즉 초1, 초4, 중1, 고1 때 이루어지게 되죠. 저도 한국에서 의대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떠나기 전 일반의 신분으로 학생검진 진료를 한 적이 있었는데요. 세계 최고의 저출산 국가라는 명색이 어색하게 몇백 명의 학생이 체육관에 줄을 서있었고, 1분 안에 학생 1명을 봐야 하는 공장식 진료여서 의미 있는 신체진찰을 하기 어려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런 진료환경에서 성조숙증을 확인하기 위해 가슴을 진찰하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죠.
한국이라는 나라의 경제 수준과 최악의 저출산 위기인 상황을 감안했을 때 아직도 이렇게 주먹구구로 아이들을 검진을 하는 것이 참 아이러니 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이들의 건강검진에 대한 적극적인 투자가 이루어져 성조숙증을 비롯한 많은 소아과 질환들이 조기에 발견되고 치료되었으면 합니다.
image credit: Flickr - National Library of Medicine
references:
1. https://news.nate.com/view/20230525n02671
2.Bräuner EV, Busch AS, Eckert-Lind C, Koch T, Hickey M, Juul A. Trends in the incidence of central precocious puberty and normal variant puberty among children in Denmark, 1998 to 2017. JAMA network open. 2020 Oct 1;3(10):e2015665-.
3. Nelson Textbook of Pediatrics. 20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