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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의 고질병

직업병은 어디서나 발병한다

by 그리여

한 계통에서 오래 일하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시나브로 그 일에 스며든다.

일정한 일을 반복하면서 그 일의 관점으로만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인지적 편향으로 이어진다.

그 관점은 일상적인 사고방식에도 영향을 주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특정직업의 사고방식, 문제해결 틀, 위험 인식 방식 등이 일상생활 전반에까지 퍼지면서 다양한 시야를 가지게 어렵게 된다.


의사는 사람의 일상이나 생활습관을 의료적 시각으로 과도하게 볼 것 같다

변호사는 일상의 대화나 사건도 법적 책임과 규정의 틀로 해석하려 할 것이고, 친구나 가족 간의 갈등에서도 법리적 판단을 하지 않을까

회계사나 재무 전문가는 인간관계나 감성적 갈등에서도 수치나 비용 대비 효율로 보고 감정보다 리스크 분석이나 수익성을 우선할 것 같다.

개발자는 감정의 문제도 기술적으로 해결하려고 하고 논리나 효율성에만 집중해 정서적 공감이 부족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렇듯 우리는 자신이 가진 직업의 틀 안에서 일상을 자기도 모르게 가두어 두고 있다.

회사가 혹은 일이 지긋지긋하다고 하면서도 결국은 일상에서 일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편집을 한창 할 때는 일상생활을 하면서도 간판이나 책의 활자나 뭐든 보기만 하면 오타만 찾게 되고, 1미리만 비뚤어도 바로 잡고 싶고 서체가 뭐니 이게 맞니 저게 이쁘니 온통 그 생각만 났었더랬다.


한 가지 일에 빠진다는 건 그런 것인가 보다.

매일 일어나서 밥 먹고 하는 일이 일정하다 보면 회사를 가지 않더라도 일상에서 심정적인 일을 하게 된다.

보이는 게 그것밖에 안 보이는 순간이 온다.

우린 그것을 직업병이라 불렀다.


맘 : 이번에 모임회비를 깜박하고 송금을 안 했네

서이 : 엄마 회비가 얼만데

맘 : 모임마다 다른데 이 모임은 매달 2만 원이야

서이 : 기준은 뭔데?

맘 : 부부동반이라 가구당 걷는 거야

서이 : 그럼 1인당 만원인 거네

맘 : 그런 셈이지

서이 : 일 년이면 24만 원이네 모임이 많으면 최소의 회비만 지출로 잡는다고 해도 금액이 만만찮겠네

맘 : 그렇긴 하지 보통 모임은 한 개만 있는 게 아니니까 그리고 금액도 더 많이 내는 곳도 있으니까. 근데 서이야 너 그거 아니?

서이 : 뭐?

맘 : 너 원래 계산하는 거 싫어했잖아. 예전 같으면 '어 2만 원이구나' 하고 말았을 텐데 지금은 자연스럽게 암산하고 있어

서이 : 그러게 나 원래 작든 크든 계산하는 거 싫어하는데

맘 : 직업병 초기증상이네

서이 : 그런가? 하긴 내가 요즘 그전과는 달라지기는 했어

맘 : 너도 이제 세무서 직원 다됐네


회사에서 맡은 업무가 있으면 본의 아니게 그 일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무슨 일을 하느냐에 따라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툭툭 튀어나오는 게 직업병이다.


밥 먹고 매일 그 일을 하다 보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전문가가 되는 순간이 온다.

무슨 일을 하든 전문으로 잘하는 것이 있다는 건 멋진 일이다.

스스로 자부심도 생기고 뭔가 특별해진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세상에는 수많은 직종이 있고, 그 직종에는 반드시 특출한 전문가가 있다.

인간계가 아닌 사람의 기술을 우리는 달인이라 부르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경이롭게 바라본다.


막내 또한 그렇게도 싫어하던 숫자놀음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다.


그전과 다르게 이제는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받던 스트레스는 약해지고, 일을 못하는 동료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한다.

너무 혼나고 있으니까 그걸 보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가 되어 자기도 모르게 일을 해 주더라는 것이었다.

그러다 문득 현타가 왔단다.

서이 : 내가 보모도 아니고 왜 다 해 주어야 하지! 왜 나만 일을 다해야 하지! 저 친구는 뭐 하는 거지! 아 힘들다

맘 : 안 해 주면 되지

서이 : 위에서 시키는 일도 제대로 못하고, 때로는 같이 해야 되는 일도 있는데, 저 사람이 그 일을 제대로 못하면 나도 같이 혼나게 되니 어쩔 수가 없어. 자기가 뭘 하는지도 모르는 것 같을 때가 많아. 늘 어수선하고, 대표님이 달력에다 표시하고 일하라! 잊지 말아라! 하고 지시했는데도 그걸 또 안 하고 여기저기 메모만 하고 찾지도 못하고... 하아~ 그래서 내가 달력을 뽑아서 해 주었어. 정말 내가 뭐 하는 건지

맘 : 에고 우리 막내 고약한 시누이 만났네

서이 : 혼나고 있는 거 보면 불쌍하기도 하고 사람들이 다 싫어하는 거 같아서

맘 : 저런

서이 : 아 정말 지친다 화가 난다

맘 : 어쩌냐


내가 해 줄 말이 없다.

회사에서는 일을 잘하는 사람이 착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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