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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듣지 못한 한마디

이별하지 못했다

by 그리여

엄마는 여러 가지 지병을 앓고 계셨음에도 당신 몸을 돌보시는 걸 극구 소홀히 하셨다.

억지로 병원이라도 모시고 갈라치면 ‘내 몸은 내가 안다’라고 하시면서 수선 떨지 말라고 하셨다. 엄마의 고집은 누구도 꺽지 못했고 그저 기본적인 관리만 하시고 우리는 그런 엄마를 늘 안타깝게 생각하고 이런저런 구실로 병원 모시고 갈 궁리만 할 뿐이었다.


어느 날 전혀 모르는 동네에 집을 하나 장만하셨다.

"나중에 엄마가 없어도 너희들은 여기 와서 모여서 놀아래이"


갑자기 고향을 왜 떠나고 싶으냐고 물어보았다.

"난 이 동네가 싫다. 지긋지긋하대이 나 죽으면 이 동네가 아닌 곳에 묻으래이"

"뭔 그런 말을 해 오래 살아야지"

"오래 살면 뭐 하노 죽으면 편하대이"

그 말이 그렇게 와닿지는 않았더랬다 왜냐하면 엄마는 영원히 살 거라는 생각으로 굳어있던 때였다.


아마도 그동안 살던 동네에는 아픈 추억과 고생한 기억만 있어서 떠나시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다가 갑자기 밭을 하나 사서 콩을 심으셨다. 왜 그랬는지 지금도 모르겠다 아니 알 것도 같기는 하다. 아마도 밭이 없었던 탓에 그랬는지도 모르겠다고 짐작만 할 뿐이다. 그것이 화근이 되었다. 뙤약볕에 콩밭을 메시다가 급기야 병원 신세를 지게 되셨다. 그때까지만 해도 다시 건강해질 거라 생각했지 다시는 병원에서 못 나오실 줄은 짐작도 못했다.


원래 몸이 좀 쇠약해져 있는 상황이었던지라 목소리가 힘없이 작아지셨다. 늘 크고 활달한 목소리의 엄마가 힘이 없는 작은 목소리로 말하시니까 덜컥 겁이 났다. 병원에 입원하고 계시는 동안 엄마는 생기 잃은 화초와 같았다. 물기 빠진 마른 낙엽처럼 버석거리는 손을 만지니 마음이 아팠다.


주말마다 찾아가서 병이 호전되길 바랐다.


“나 집에 데려다주고 가면 안 되나”

“엄마 다음 주에 오면 모시고 갈게 지금은 퇴원이 안 된대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어야 갈 수 있어 그러니 잘 드시고 치료 잘 받고 있어 그러면 다음 주에 모셔다 드릴게”

"애들이 보고 싶대이"

"다음 주에는 데리고 내려올게 기다리고 계셔 애들이 많이 걱정하고 있어"


그렇게밖에 말할 수가 없어서 마음이 안 좋았다. 엄마의 그 애잔한 눈빛이 내내 잊히지 않았다.


“니가 해 준 단호박죽이 먹고 싶다”


엄마가 뭘 먹고 싶다는 말씀을 잘하시지 않는데 기운을 차리려고 그러나 보다 하고 주말에 끓여서 가지고 갔다. 엄마는 맛있게 드시고 나서 말씀하셨다.


“우리 딸이 해주는 단호박죽이 제일 맛있다 어예 이렇게 맛있게 끓이노"


그게 내가 해드린 마지막 식사가 될 줄은 몰랐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7년 동안 단호박죽을 끓일 수가 없었다.

그 이후로도 엄마의 병원 생활은 계속되었다.


어쩐지 떨어지지 않던 무거운 발길을 돌려서 서울을 올라오고 이틀 있다가 엄마가 쓰러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병원에 계셔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뇌혈관이 터져서 의식이 없다고 하신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공포에 휩싸였다. 부랴부랴 시골로 내려가는데 왜 그리 불안하던지. 의사 선생님은 뇌가 다 녹아서 수술도 소용없다고 포기하라고 했다. 어떻게 저렇게 무서운 표현을 하지 하면서도 매달렸다. 1%의 가능성만 있어도 잡고 싶었다.


“수술해 주세요”


의사가 가망이 없다고 만류하였지만 엄마는 수술을 하였고 깨어나지 못하고 중환자실에서 의식도 없이 누워 계셨다. 그래도 따뜻한 온기를 느낄 수 있기에 보내 드릴 수가 없었다. 희한하게 의식이 없는 와중에도 엄마는 내가 다가가면 눈물을 흘리셨다. 들을 거라 생각하고 엄마에게 끊임없이 말했다.


“엄마! 엄마는 강하잖아 왜 그러고 누워 있어. 빨리 일어나서 집에 가자 병원 싫어하잖아”


그렇게 엄마는 말도 못 하는 아기로 누워서 평생을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살았었는데 지금은 기계에 의지한 채로 가늘게 삶을 끈을 잡고 계셨다. 중환자실에서 별다른 호전을 보이지 않자 병원에서는 침대를 비워줄 것을 요구하였다. 우리는 안된다고 제발 살려달라고 했지만 병원 측은 단호했다.


“더 이상 할 것이 없습니다 병실이 없으니 다른 곳으로 옮기세요”


그렇게 병원에서 쫓겨나다시피 퇴원을 하게 되었다. 수소문 끝에 치료를 병행하는 요양원에 모셨고 엄마는 끝내 의식을 찾지 못하고 기나긴 요양원 생활을 하시게 되었다. 가만히 있는 것을 못하시고 그렇게 움직이시더니 이제는 힘이 부쳤나 보다 꼼짝을 안 하신다.


우리는 주말마다 서울에서 대구로 달려갔다. 눈이 오지 않던 동네였는데 그 해는 어찌나 눈이 많이 왔던지 아직도 하얀 길이 생각난다. 그해 겨울. 길은 하얗게 눈부셨고 마음은 숯덩이처럼 검게 타들어갔다.


엄마가 한 번이라도 깨어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달렸다. 아직 한 마디도 나누지 못하였기에 급작스럽게 일어난 일에 우리 가족은 심하게 흔들렸다. 그래도 끈끈하게 엄마를 잡고 있었다. 대구 사는 동생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엄마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주변에서 사람들은 말하였다. 엄마가 평소에 얼마나 잘하셨으면 자식들이 저렇게 애틋하게 잘 보살필까라고 했다. 하기사 주변 요양사들 말을 들어보면 한 번도 찾아오지 않는 가족들도 있다고 하셨다.


우리는 엄마를 이대로 보내 드릴 수 없었다. 아직 못한 말이 있다. 엄마의 크고 활달한 목소리를 한 번이라도 더 듣고 싶다는 열망으로 힘든 줄도 모르고 간호를 하였다. 요양원에서 엄마는 몇 번의 고비를 넘겼다. 욕창으로 살이 문드러지는 걸 아프게 봐야 했고 심폐소생술에 약한 갈비뼈가 부서진 아픈 상황과도 마주해야 했다.


2년 하고도 반년 넘게 엄마는 원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한 고된 요양원 생활을 해야 했다. 말은 못 해도 얼마나 싫으셨을까 우리의 욕심에 이렇게 잡아두는 게 과연 맞는 것일까. 그래도 마지막 인사는 해야지 그래야 보내 드리지 하는 자기 합리화를 하며 엄마를 힘겹게 잡고 있던 미안함에 엄마를 꼬옥 끌어안았다.


묏자리를 잡아두면 오래 사신다고 하길래 엄마가 생전에 집을 장만하신 그 동네에 묏자리를 알아보러 다녔다. 마땅한 게 없어서 속이 상했다 엄마는 고향에 묻히기 싫다고 하셨는데 이 동네에는 엄마를 누일 마땅한 곳이 없었다. 이렇게라도 하면서 엄마가 빨리 일어나길 빌고 또 빌었다.


안타까운 시간이 흐르고 나와 형제들은 결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보내드려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서로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엄마에게 고비가 왔고, 이제야 편안하게 해 드리려 어렵게 손을 놓았다.

그 손을 놓는데 오래 걸렸다.


밭을 왜 사셨냐고 묻고 싶었지만 엄마의 목소리를 이제는 들을 수가 없다.

엄마는 살고 싶었을까 살아지신 걸까 이것 또한 알 수가 없다.


거짓말 같은 마지막 순간은 진짜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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