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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속의 먹거리는 그리움으로 12

무서운 황도복숭아캔

by 그리여

어렸을 때 나는 친할머니를 뵌 적이 별로 없다

물론 추억할만한 일도 없다

가끔 한 번씩 오셔서 동생을 업고 봐 주었다는데 난 한번 뵌 기억이 전부다

아버지랑은 얼굴형이 닮았고, 뭔가 인자한 표정이었는데 큰집의 사촌 큰언니가 자라면서 내 기억 속의 할머니 얼굴이랑 많이 닮아 있었더랬다 조용하고 말수가 별로 없던 성품도 비슷하지 않았나 짐작해 본다


어느 날 새벽

아버지는 우리를 깨워서 경운기에 태우셨다

아버진 한마디도 안 하시고 그 새벽에 멀고 먼 꼬부랑꼬부랑 산길을 하염없이 운전하셨다

울퉁불퉁한 시골길을 경운기는 덜커덩덜커덩 쉼 없이 달렸다

나는 뒤에 웅크리고 앉아서 꼬박꼬박 잠이 들어있었다

불편한 줄도 모르고 잠을 자다가 깨우는 소리에 부스스 눈을 뜨고 경운기에서 내렸다

큰집 앞마당이었다

새벽녘 자욱하던 안개가 스멀스멀 물러나고 검푸르스름한 어둠이 걷히고 있었다


문득 열린 작은방을 보는데 곱게 빗질이 되어있던 할머니의 가르마가 눈에 들어왔다

할머니 베개 옆에는 황도복숭아캔이 놓여있었다

무슨 일인가 의아해하는데 큰아버지가 아버지를 보시더니 말씀하셨다.

어머님이 돌아가셨다.


그랬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어른들의 우는 소리가 들리는데 나는 황도복숭아캔만 눈에 크게 들어왔다

할머니가 저거 드시고 돌아가셨나

황도복숭아캔이 무서웠다 문득 싸한 소름이 돋았다

저걸 먹으면 할머니처럼 꼼짝 못 하고 누워서 있어야 하나보다

어린 맘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참빗으로 가지런히 빗은 할머니 가르마만 각인되었다

그리고 그 옆의 황도복숭아캔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도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황도복숭아캔은 지금도 먹지 않는다

단 걸 싫어하고 물컹한 식감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보다 황도복숭아캔을 보면 그날의 소름 돋고 무서웠던 기억이 살아난다

잊히지 않는다 물론 황도복숭아캔을 먹는다고 죽는다는 건 말이 안 된다는 것도 안다


털이 많은 털복숭아가 우리 고장에는 많았다

나는 털 알레르기가 있었나 보다

복숭아를 만지면 온 팔뚝이 간지러워서 긁다 보면 벌겋게 부풀어 올랐다

그래서 더 싫어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알레르기가 거의 없어지고 털 있는 복숭아도 많지 않다

그 덕분에 복숭아를 맛나게 먹게 되었다

아직도 복숭아털은 싫다

근질거렸던 그 기억이 생생하게 느껴지고

팔뚝에 스멀스멀 벌레가 기어가는듯한 느낌이 상기된다


할머니의 정을 느껴본 적도 없던 내가 그날의 할머니 가르마가 지금까지 생생한 건 무슨 일이란 말인가

너무 어렸을 적이라 잊을 만도 한데 아직도 잊지를 못하고 있다


내가 처음으로 접한 죽음이어서 그런가

시간이 흘러도 그날의 황도복숭아캔과 할머니는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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