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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살처럼 Nov 13. 2024

세 명의 주인공

# 기억의 조각


 '돈과 사랑, 여유의 결핍으로 점철된 삶이었다.'

이게 나의 과거를 나타내는 한 줄이다. 문장을 이어 나갈 접속사는 두 가지, '그래서'와 '그럼에도'가 있다. 둘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누군가 이런 질문을 하면 나는 고민하지 않고 '그럼에도'를 고를 것이다. '그래서' 힘든 날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버틴 날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버티며 살면 긍정적인 사람이 되기 힘들다. 부정적인가? 그건 아니다. 긍정과 부정의 딱 중간지점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긍정적이지 않은 상태'에 놓여 있다랄까. 힘든 세상 살이, 나쁜 쪽으로 기울지 않은 것만으로 다행인 것 같다. '그럼에도' 유독 염세적인 태도를 드러내는 하루는 있었다.

'엄마도 없고, 가난해서 고생만 하는 지랄 맞은 인생, 도대체 왜 사는 걸까?'

삶과 존재의 이유를 부정하던 날, 그날은 내 생일이었다.


 생일은 스스로 주인공이 되는 날이라고 하지만 나는 조연처럼 눈에 띄지 않는 하루를 보내고 싶었다. 가난이 일상이 되면 그냥 조연처럼 살고 싶어 진다. 주인공처럼 하루를 사는 것도 쉽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다.   

'갖고 싶은 선물을 말하는 건 사치다.'

'억척스레 하루하루 버티며 사는 가족들에게 축하를 받는 것도 미안하다.'

'특별한 날이라고 챙겨 줘야 할 부담감을 그 누구도 느끼지 않았으면 한다.'

생각도 덩달아서 가난해진 날이 생일이었다. 주인공은 무슨.

 

 생일 선물을 받을 땐 그래도 기쁘지 않았나? 세상에 나온 이유를 모르니 선물을 받아도 별 감흥이 없었다. SNS를 통해 받았던 선물교환권과 축하 메시지가 신선했던 적은 있다. 존재의 이유나 고민하면서 을씨년스럽게 보내던 날, 누군가의 축하를 듬뿍 받는 건 새로운 경험이었다. 하지만 SNS로 전하는 마음은 꽤 위선적이다. 축하한다며 촛불같이 빛내 주던 마음은 생일 알림 기능을 끄는 순간 함께 꺼진다. 손가락 터치 한 번으로 확 줄어든 선물과 메시지. 결국엔 주고받기(기브 앤 테이크)인가 싶었다. 내가 주었으니 받은 것뿐인 계산적인 상황. 선물 교환권은 내 돈 내고 내가 산 것, 축하 메시지는 내가 나에게 보낸 것 같았다.


 허탈함 속에서 떠 오른 건 생일 즈음 전화로 건네는 아버지의 말이었다.

"곧 생일이제? 그냥 한번 전화해 봤다."

뒤늦게 알았다. 무뚝뚝하긴 해도 매년 듣는 이 한 마디가 가식 없고 정직하다는 걸. '그냥.' 아마 축하한다는 의미일 테다. '한번.' 한번이라 했지만 아버지는 내 생일을 단 한 번도 잊지 않았다. 궁금했다. 아버지는 왜 한결같이 내 생일을 축하해 줄까? 이유는 간명하다. 내가 태어난 날이니까. 그럼 왜 태어났나? 왜 살아야 하는가? 내 질문으로 돌아왔다. 생각을 캐고 캔 뒤 떠 오른 건 다시 '태어난 날'이었다. 내가 세상의 빛을 처음 본 날, 엄마 아빠는 인생에서 가장 진한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삶의 이유도 바뀌었을지 모른다. '태어났으니까 그냥 산다.'에서 '네가 태어났으니까 산다.'로. 살아야 할 이유를 하나 찾았다.


나는 살아야 한다.

내가 살아야 할 이유는

내 존재가 누군가에게 살아야 할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


 궁금증이 또 있다. 왜 생일의 주인공이 '나'인 걸까.

'사람이 형태를 갖추어 어미로부터 세상에 나오다.'

태어나다의 사전적 의미다. 여러 번 읽어 봐도 '어미로부터'가 눈에 들어온다. 나를 낳은 사람은 엄마다. 엄마가 생일의 주인공이어야 한다. 엄마가 아니라도 내가 주인공일 순 없다. 내가 태어난 날. 함께 기뻐한 또 한 사람, 아빠가 또 다른 주인공이다. 그럼에도 내가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이유가 뭘까. '나'라는 존재로 인해 '살아갈 이유'를 선물 받은 엄마와 아빠가 주인공 자리를 양보하기 때문이 아닐까. 어쩌면 생일은 숨은 두 주인공이 한 사람만 주인공으로 만들려고 노력하는 날일지 모른다. "태어나줘서 고마워."라는 말을 하면서.




# 비 오는 날의 편지



엄마.

엄마는 생일을 주인공처럼 보냈었어?

난 주인공은커녕 생일이 싫었어.

힘든 현실을 외면하고

억지로 기쁜 척해야 하는 날 같았거든.


내 생일은

엄마가 주인공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어.

날 낳은 사람도,

내가 태어난 날을 기억하는 사람도 엄마잖아.


누군가 '미역국은 먹었어?'라고 물으면

속으로 대답했지.

'내가 왜 먹어. 엄마가 먹어야지.'


생일날 미역국을 먹는 의미가

'양육으로 고생한 엄마의 은혜를 기억하라'야.

'엄마'를 기억하라는 걸 보면

주인공은 엄마인 게 확실해.


아빠도 주인공이지만

난 엄마가 진짜 주인공이라 생각해.

아빠보다 엄마를 뱃속에서 먼저 만났으니까.


엄마가 주인공이면

생일이란 명칭도 바꾸면 좋을 것 같아.

'낳은 날'인 걸 강조해서

'만일(日, 한자어 낳을 만)'이 어떨까.

그럼 재밌는 말도 많이 생길 것 같아.

'만일에 엄마가 날 낳지 않았으면

세상 구경도 못할 뻔했네.'처럼.


엄마.

엄마가 떠난 뒤 맞던 생일엔

사실 주인공이 누군지 따지는 보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많이 던졌어.

'나는 왜 태어났을까?'

'나는 왜 살아야 할까?'


엄마가 없어서

더 어려워진 가정 형편 때문에

이런 질문을 했을지 모르지만

꼭 경제적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어.

엄마가 있을 때도 우리 집은 힘들었으니까.

  

지금은 왜 그랬는지 알 것 같아.

엄마의 죽음을 경험했기 때문이야.

사람은 죽음을 보면 '삶'에 질문을 던져.

'어떻게 살아왔는지, 왜 사는 건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엄마.

깊게 고민한 것치곤 

내가 찾은 삶의 이유는 너무 단순했어.

'내 존재가 곧 누군가 살아갈 이유일지 모른다.'

이 한 줄을 깨닫는데 왜 그리 긴 시간이 걸렸던 걸까.  


엄마.

이제야 생일의 의미를 제대로 안 것 같아.

'나'란 존재를 선물 받은 엄마가,

나를 너무 예뻐하고 사랑한 엄마가,

주인공 자리를 나한테 양보해 준 날,

그날이 생일이란 걸.


이제 생일이면

엄마한테 미역국도 끓여 주고,

'태어나게 해 줘서 고맙다'는 말도 하고 싶은데  

진짜 주인공인 엄마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거야?


엄마.

'엄마'라는 주인공이 없으면

앞으로 맞이할 생일도

완전히 좋을 순 없을 것 같아.


그래도 즐겁게 지내볼게.

나한텐 주인공 자리를 양보해 준 또 다른 사람,

무뚝뚝하긴 해도 항상 생일을 축하해 주는 사람,

아빠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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