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전문가 강판권 작가의 책 '나무 예찬'에 소개된 향나무(경남 밀양 북부면의 추원재와 대구 동구 옻골 보본당의 향나무)를 보고 있으면 '생존을 향한 몸부림'이 느껴진다. 나무 몸통이 담벼락에 끼여서 꺾일 듯 말 듯하다가 끝내 하늘을 향해 뻗은 모습이 경이롭기 그지없다. 좁은 공간에서도 살아남은 향나무의 강인한 자태를 보고 있으면 '불행은 어려운 조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삶을 포기하는 데서 온다'는 저자의 말에 절로 공감하게 된다.
향나무처럼 좁은 공간에서 강한 의지를 가지고 산 사람이 있다. 아버지다. 엄마가 떠난 후 아이 셋을 건사하며 바늘 공장에 다녔던 아버지의 삶은 언제나 팍팍했다. 팍팍한 삶을 사는 사람들의 공간은 언제나 좁다. 몸을 누일 수 있는 방부터 좁다. 방이 좁으면 절약이 몸에 밴다. 생계비에 한정될 만큼 돈 쓰는 범위가 좁아지면 자연스레 인간 관계도 좁아진다. 대신 내일을 생각하는 마음은 넓다. 나의 내일을 생각하는 게 아니라 '자식들의 내일'을 생각하니 넓은 거다. 좁은 오늘과 넓은 내일, 그 사이에서 잉태되는 건 강한 의지다. 그런 단단한 의지로 고되고 거친 하루를 버텨 온 사람이 아버지였다.
경남 밀양 추원재의 향나무
지나 온 내 삶도 좁았다. 취업 실패를 연이어 경험했을 때 그다지 크지 않은 키를 다행이라 여길 만큼 내 고시원 방도 점점 좁아졌다. 통장 잔고도, 사람과의 만남도 0에 수렴해 갔지만 내일을 생각하는 마음은 넓었다. 물론 아버지만큼 넓진 않다. 예전에도, 지금도 아직 책임질 사람이 없으니 내일을 향한 초점이 '나'에게만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오늘을 사는 공간이 좁아도 내일을 생각하는 마음은 넓게!'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이런 마인드를 나는 '의지'를 뜻하는 영단어를 넣어 '윌(will)의 정신'이라 호명하고 있다. 땡전 한 푼 받지 못하고 의지만 상속받아서 가끔 억울한 생각도 들지만 어쩌겠는가. 아버지도 받은 게 없으니 물려줄 게 없을 뿐이다. 자식에게 엄청난 재산을 상속하는 부모는 자식의 재능과 에너지를 죽이는 것이라는 말*(낸시 폴브레, 보이지 않는 가슴 참고, p.239)도 있으니 마음 비우고 사는 게 정신 건강에 이로울 듯하다. 어찌 되었건 '윌의 정신'은 힘겨운 세상살이에 버틸 동력이 되니 도움이 될 때가 많다. 단, 맹점이 좀 있다. 좀체 '웃고 살지 못한다'는 것이다. 눈앞에 당면한 어려움만 이겨내면 절로 웃게 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좀 환하게 웃고 싶었다. 누군가의 기분을 맞춰 주거나 보여주기 위한 옅은 웃음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진한 웃음'을 짓고 싶었다. 실체 없는 내일의 미소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눈에 보이는 '오늘의 미소'를 짓고 싶었다. 오전에 좋지 않은 일을 겪고도 오후에 다시 웃음을 되찾는 직장 동료가 있다. 신기하면서도 궁금했다. 힘든 일을 겪고도 금방 웃을 수 있는 힘은 대체 어디서 비롯되는 걸까.
매일 걷는 산책길. 그 길엔 다정한 엄마와 아이가 있다. 마주칠 때마다 엄마도, 아이도 웃는다. 봄이면 활짝 핀 꽃처럼 밝게, 가을이면 알록달록한 단풍처럼 예쁘게 웃는다. 어느 해 질 녘, 나는 아이에게 사탕 하나를 건넸다.
"고맙습니다. 해야지!"
엄마의 말에 아이는 방긋 웃으며 배꼽 인사를 했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아이 엄마도, 나도 웃었다. 엄마의 웃는 모습을 본 아이는 또 한 번 까르르. 뉘엿뉘엿 해는 지고 있었지만 엄마와 아이의 웃음은 저물 듯 저물지 않았다. 그날, 나는 알게 됐다.
'살아야겠다'는 내일의 의지는 아빠,
'살고 싶은' 오늘의 웃음은 엄마가 만들어 준다는 것을.
세상의 빛을 처음 본 날, 가장 먼저 마주하는 건 엄마의 웃는 얼굴이다. 엄마가 웃으면 따라서 웃는 하루하루. 그 반복되는 하루를 통해 우리는 웃는 법을 배웠지만 어느 순간 웃지 않는 하루를 반복한다. 어른이 되어도 매일 웃을 줄 아는 사람은 엄마와 함께 웃던 지난날을 기억하며 사는 사람이 아닐까.
나는 엄마와 함께 웃던 하루가 손꼽을 만큼 적다. 이는 곧 내가 잘 웃지 못하는 이유기도 하지만 이제라도 방긋한 하루를 보내려면 '지금 이 순간'을 웃음으로 채워야 한다는 의미기도 하다. 자주 웃으려 노력해야겠다. 그러려면 '윌(will)의 정신'을 수정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will 뒤에 ing를 붙이는 건 어떨까. '미래로 유예하지 말고 '지금(ing)' 웃으라'는 의미로 말이다. 적어 놓고 보니 신기하다. ing를 우리말로 끊어 읽으면 '인지(in-g)'가 되는데 꼭 지금 웃어야 함을 '인지'하라는 것 같아서.
'윌링(willing) 정신'
더 멋있는 표현이 되었지만 '웃음'의 의미가 추가되어 실천하기는 더 어려워진 것 같다. 그래도 꺼리지 말고 웃어야지. '꺼리지 않는'이라는 willing의 본 의미도 살릴 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