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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살처럼 Nov 06. 2024

닮은 맛


# 기억의 조각


 "엄마, 밥 조금만 더 줘"

한 가지 반찬뿐인데 투정 부리지 않고 밥 잘 먹던 날. 엄마가 김장을 담근 날이었다. 금방 버무려진 김치, 고슬고슬 지어진 하얀 쌀밥. 엄마가 툭툭 찢어 준 김치에 밥 한 숟갈 먹으면 매콤하고 아삭아삭, 시원한 맛이 입안에 퍼졌다. 한 숟갈, 한 숟갈 볼때기 불룩하게 먹다 보면 순식간에 배도 불룩.  


 밥을 먹다 김치로 꽉 찬 커다란 통을 보고 말했다.

"엄마, 왜 이렇게 김치를 많이 담가?"

"겨울은 추워서 먹을 게 귀해. 쟁여 놓은 음식이 많은 게 좋거든."
'쟁여놓다.'는 말이 싫었다. 냉장고가 김치로 가득 차면 얼마 후 엄마는 집을 비웠다. 겨울나기가 아니라 떠나기 위해 엄마가 쟁여 두는 음식. 그게 김치 같았다. 매콤하고 시원하다가 시큼하고 시원찮게 변하는 맛도 싫었다. 금방 담근 김치 툭툭 찢어 줄 땐 진짜 엄마, 나 몰라라 집 비울 땐 가짜 엄마. 변해가는 김치 맛이 꼭 변덕쟁이 우리 엄마 같았다.  


 시간이 흘러. 사무실에 일찍 출근하면 뜨뜻한 믹스커피 한 잔 주시던 환경 미화원 아주머니가 있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커피 한잔 건네받던 어느 날, 조금 미안한 얼굴로 아주머니가 말했다. 

"저기.. 부탁 하나만 들어 줄래요? 간단한 건데..."

맨날 커피 건네는 마음이 고마워 손에 쥔 커피처럼 따뜻한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뭔데요? 말씀해 보세요."

사정은 이랬다. 대문 열쇠를 방안에 두고 출근해서 문이 잠긴 상황. 사람을 부르자니 돈이 많이 드니까 담을 넘어 대문을 열어 달라는 것. 도둑처럼 남의 집 담장을 넘어야 하는 상황이 우스꽝스러웠지만 흔쾌히 수락했다. 뭐 어려운 일이라고. 문을 열어 드리고 돌아가려는 데 아주머니가 커다란 통하나를 건네며 말했다.

"김치 좀 먹어 봐요. 도와줬는데 따로 챙겨 줄 건 없고..."

 큰 도움이 아니었기에 사양했지만 아주머니는 한사코 내 손에 김치통을 쥐어 주셨다.


 큰 통에 여러 포기 담긴, 신 맛과 안 좋은 기억이 같이 버무려진 익은 김치. 오랫동안 좋아하지 않았는데 아주머니 김치는 달랐다. 시큼하지만 개운해서 자꾸 손이 가는 맛. 금방 담근 김치가 아니라 신 김치로 밥 한 그릇 뚝딱 비운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양이 많아서 꽤 오래 먹었다. 볶아 먹고, 끓여 먹으면서.  


 살다 보니 엄마 닮은 사람들에게 김치를 많이 받았다. 인사 잘하고 싹싹하다고 한 포기, 아들 같다고 한 포기, 반찬 없을까 봐 한 포기. 한 포기씩 먹다가 김치의 신맛이 좋아졌다. 신맛이 좋아지니 숨은 맛도 보였다.

김치를 건네는 다정함과 걱정이 깃든 엄마들의 맛이. 



# 비 오는 날의 편지



엄마. 

엄마랑 김치는 닮은 점이 많은 것 같아.


냉장고 문을 열 때

없으면 그러려니 하다가 

문득 생각나는 반찬이 '김치'야. 


엄마도 똑같아.

엄마 없이도 그냥저냥 사는데 

갑자기 그리워지거든.


어릴 때도 비슷했어.

빳빳했던 배추가 소금물을 만나면 흐물흐물.

양념장에 버무려지면 매콤 시원.

시간이 지나면 시큼 털털.


변해가는 김치처럼 엄마 마음도 변했지.

금방 담근 김치 툭툭 잘라 줄 땐 다정다감.

김치 쟁여 두고 집 떠날 땐 냉랭하고 쌀쌀.

돌아올 땐 미안하고 또 미안. 


엄마.

금방 담근 김치가 제일 맛있는 줄 알았어.

김치 담그던 날, 양념 버무린 김치를 

엄마 손으로 툭툭 찢어 준 것도  

가장 맛있을 때 많이 먹으라는 의미 같았지. 


삭은 김치 맛을 알게 된 건 

김치 한 포기 건네던 다정한 엄마들 때문이었어.


아들 같다며 챙겨 주던 포기 한 포기

전부 신 김치라 그냥 먹긴 어려웠지만

다른 것들과 곁들여 먹으니까 너무 맛났지.


익은 김치가 닮은 것 같아서 신기했어. 

혼자서는 강한 맛,

다른 음식과 어울리면 친근한 맛. 


그런 익은 김치 맛처럼  

나도 혼자서 강한 마음먹고 살았지만

엄마 닮은 사람에겐 항상 살갑거든.


엄마.

모든 엄마들이 나처럼 살기를 바라는 것 맞지?

혼자일 땐 강하고 씩씩하게, 

다른 사람과 어울릴 땐 모나지 않고 곡선처럼 부드럽게.  

사람은 늙어 가는 게 아니라 익어가야 한다는데

나 이 정도면 익은 김치처럼 잘 살고 있는 거지?


엄마.

얼굴에 찬 바람이 느껴지면 엄마 김치가 생각 나.

신 김치가 좋아져서 그런 걸까.

익어 가도록 살고 있어서 그런 걸까. 

이젠 궁금하고 그리워

다른 사람 김치가 아닌

제대로 먹지 못했던 엄마의 익은 김치 맛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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