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9시, 학교 방송 스피커엔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왔다. 잔잔한 멜로디가 왜 그리 서글프게 들렸던지 매일 눈물이 났다.
"햇살아, 왜 울어?"
선생님의 물음에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집을 나갔어요.. 엄마가.."
선생님은 엉엉 우는 나를 무릎에 앉혔다. 아랫목같이 따뜻했던 선생님 무릎. 가만히 앉아 있으면 불안함이 사라지고 눈물도 금세 뚝 그쳤다
방과 후 집에 오면 혼자 있는 게 무서워 울기 시작했다. 서럽게 우는 소리가 안타깝게 들렸던 걸까. 이웃에 사는 누나가 자주 찾아왔다.
"울지 말고 우리 집에 가서 라면 먹자."
항상 눈물 닦으라 손수건을 건네던 손. 그 다정함에 뭉클해져서 다시 눈물이 방울방울. 그럴 땐 젓가락을 손에 꼭 쥐어 주며 누나가 말했다.
"그만 울어. 라면보다 얼굴이 더 빨리 붓겠어."
금방 끓인 뜨뜻한 라면. 냄비 뚜껑 열 때 확 올라오는 연기가 울다 지친 마음을 와락 앉아 주는 것 같았다.
혼자 집에 있는 게 싫어 동네를 거닐던 날도 있었다. 시뻘게진 얼굴을 하고 엉엉 울면 '꼬마야'하고 부르던 목소리. 집 근처 구멍가게 평상에 앉은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가 부르는 소리였다. 가만히 다가가면 왜 우는지 묻지 않고 과자 한 봉지 건네며 말했다.
"꼬맹아! 이거 무봐라.(먹어 봐라.) 달달하이(달달한 게) 눈물 없애 줄 맛이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마음 씀씀이는 널찍하게 놓인 평상처럼 참 넉넉했다.
다독다독 해 주던 고마운 마음들이 있었지만 엄마 없는 텅 빈 마음은 쉽게 채워지지 않았다. 마음이란 놈은 왜 이렇게 야속할까. 밥이 없을 때 빵을 먹으면 허기짐은 사라진다. 하지만 엄마가 없을 땐 다른 사람의 따뜻한 손길을 받아도 마음의 허전함은 잘 사라지지 않는다. 마음도 뱃속 같으면 좋으련만.
엄마.
어릴 적에 엄마가 집을 비우면
나를 지켜 주는 사람들이 있었어.
무릎 위에 날 앉고 달래주던 선생님,
라면 한 그릇으로 헛헛함 달래 주던 옆집 누나,
달콤한 과자 건네던 동네 할머니와 할아버지들.
막 끓여 낸 국밥처럼 모두 따뜻한 사람이었지.
엄마.
클로버의 꽃말을 알아?
한 잎 클로버는 희망,
두 잎 클로버는 눈물,
세 잎 클로버는 행복이야.
이걸 풀어쓰면
'눈물 흘리는 사람에게
희망을 전하는 누군가가 있어 행복할 수 있다.'가 돼.
정말이지 엉엉 울던 시절엔
희망을 전하는 사람이 있어서 버틸 수 있었던 것 같아.
엄마.
정 많은 사람들에게 받은 건 많은데
돌려준 게 없어서 불편할 때가 많아.
빚진 마음 앉고 사는 기분이야.
따뜻한 사람들이 건네는 손길.
그건 조건 없이 베푸는 거라서
엄마의 내리사랑을 닮은 것 같아.
엄마의 자식 사랑도 조건이 없으니까.
그런데
엄마 닮은 마음들로도
엄마 없는 허전함은 쉽게 채워지지 않아.
참 이상해.
사랑하는 연인과 헤어지면
다른 사랑으로 채우고,
배 고플 때 밥이 없으면
빵으로 허기짐을 채울 수 있는데
엄마 사랑은 왜 비슷한 감정으로 채워지지 않는 걸까.
딱 하나뿐이라서 그런 것 같아.
대체할 수 없다는 건 하나뿐이라는 의미니까.
엄마 사랑은
열심히 공부한 책과 비슷한 것 같아.
직접 필기하고 밑줄 그은 책.
세상에 한 권뿐인 그런 책이 아니면
머릿속이 채워지지 않듯
세상에 한 명뿐인 우리 엄마가 아니면
마음속이 채워지지 않으니까.
그런데 엄마.
잃어버린 책은 새 책으로 공부하면 되는데
잃어버린 엄마 사랑은 어떻게 하면 되찾을 수 있지?
엄마 사랑은 정말
세상에 단 하나뿐인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