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선증후군(KID Syndrome) 아이와 함께 걷는 삶 (3)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는 말이 싫다. 하준이가 어린이전문병원으로 이송된 후 며칠이 지났다. 매일 가는 발걸음, 매일 찾는 병동, 매일 마주치는 간호사, 매일 같이 하는 질의응답, 그리고 무엇보다 그 특유의 병원냄새와 분위기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 익숙해지는 것이 싫었다. 그 불편한 익숙함속에 반길만한 것은 오직 하준이를 만나는 순간뿐이었다. 그 와중에 한 가지 익숙해지지 않는 건, 아직도 내 아이가 아픈 아이일 수도 있다는 불안감과 초조함이었다. 의사들은 아무 말도 없었다. 물어볼 때마다 자신들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말 뿐이었다. 초조함을 제외하면 우리도 하준이도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잘 해내고 있었다. 간신히, 간신히 말이다. 마치 누구라도 이 툭하고 건드려지면 바로 터져 나올 거 같은 눈물샘을 억지로 틀어막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5일째 되었을 까. 우리는 드디어 하준이의 증상을 진단하고 있다는 여러 전문의들 중에서, 피부과 전문의를 만날 수 있었다. Dr. Gregory Cox였다. 그는 아동피부과 쪽으로는 애틀랜타 전체에서 제법 이름 있는 의사라고 했다. Dr. Cox는 우리를 만나서 반갑다면서 따뜻한 눈으로 우리에게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직 정확히 판명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래도 많이 좁혀나가는 중이라고 했다. 나에게 그의 명함을 주면서, 그 뒷면에 하준이의 의심되는 병명을 적어주었다. Ichthyosis. 처음 보는 단어였다. 하지만, 당시 의사가 나에게 해준 설명 중 내 마음에 남은 것은 그 병명이 아니었다. 바로, incurable, 치료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치료할 수 없다니. 내 아이가 치료할 수 없는 병을 가지고 있다니. 아냐. 아직 의심되는 중이라고 했어. 아닐 거야. 아닐 거야라는 말을 수도 없이 되뇌었다. 아내에게 간단히 통역을 해주자, 아내 역시도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떨리는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억지로 틀어막고 있던 우리의 눈물샘을 잔인한 현실이 터뜨리려 하고 있었다.
그 후, 어떤 정신으로 집까지 운전해서 왔는지 기억도 안 난다. 집에 오자마자 외투도 벗지 않고 바로 컴퓨터 앞에 앉아 의사의 명함 뒤에 적혀있던 병명을 검색해 보았다. 생소하기 이를 때 없는 단어라 연거푸 오타가 났다. 한껏 분통 터지고 짜증 나는 마음에 키보드 자판을 부술 듯 눌러댔다. 잠깐의 실랑이 끝에 화면에 원하는 정보가 나타났다.
[어린선증후군. 물고기 어. 비늘 린. 피부의 각질의 재생속도의 이상으로 피부가 딱딱해져서 비늘처럼 보이는 형상. 상염색체 이상으로 인한 선천성 질병이기도 하며, 유아기에는 발현하지 않다가 사춘기쯤 시작되는 후천성 질병이기도 함. 온습한 기후에서는 완화되기도 하나, 피부가 매우 예민하고 건조하여 추운 기후에서는 악화되기도 함. 선천성인 경우 꾸준한 관리 이외에 완전한 치료방법은 없음.]
읽기만 해서는 바로 이해할 수 없었다. 사진들이 필요했다. 마우스를 이리저리 움직여가며 사진과 글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이 병을 실제로 지니고 있는 사람들의 선례와 사진들을 살펴보니 그 증상의 정도가 범주가 너무나 넓어서 이 병이 얼마나 심각한 병인지에 대해서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난 학교 계정을 이용해 각종 논문 역시 검색을 했다. 논문과 의학저널 등에 실려있는 자료에도 어린선 증후군은 매우 광범위한 질병으로 소개되어 있었다. 그리고 어린선증후군은 마치 '암'처럼 큰 단위이고, 암에도 발병위치와 증상에 따라 여러 세부갈래가 있듯이 어린선증후군도 하위분류가 있는 듯했다. 하지만 왜 의사가 말했듯, 어느 자료에서든 완전한 치료사례는 찾기 어려웠다.
난 내가 찾아낸 내용들을 아내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아내는 울기 시작했다.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온 울음은 가구하나 구비되어 있지 않던 공허한 집안을 채우기 시작했다. 같이 울었다. 흐느끼고 소리쳐 울었다. 급하게 구했던 아파트는 하필 햇볕이 잘 들지 않아서 늘 어두웠고, 그 어두움은 우리의 슬퍼하는 소리에 맞춰 함께 진동했다. 그 어둠은 다시 우리를 가라앉게 만들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오래 울어댈 여유조차 없었다. 슬픔에 잠겨 있는 것도 사치였다. 아내는 회복했어야 했고 난 학교 수업을 준비하고 또 집안에 필요한 것들을 채워 넣어야 했다. 하준이를 또 보러 가기까지의 시간을 아끼고 쪼개서 써야 했다. 재정적으로는 이미 감당할 수 있던 한계를 넘어 있었다. 우리의 마음을 돌볼 여유도 없어서 점점 건조해지고 있었다. 그 어떤 재밌는 뉴스와 이슈를 접해도 이미 마를 대로 마른 우리의 입술을 들썩이게 하지 못했다. 우리의 머릿속에는 지난 검색 때 보았던 사진과 정보들만이 가득할 따름이었다.
다시 병원을 찾았을 때, 간호사가 한 가지 더 안 좋은 소식을 알려주었다. 신생아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치르는 청각테스트(Newborn Hearing Test)가 있는데, 하준이가 이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왜 통과하지 못했을까라는 질문에는 그저 여러 가능성이 있다고만 말했다. 그럼 우리 아이가 못 듣는 거냐는 질문에, 어느 정도의 청력을 가지고 있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고 했다. 마음은 한 계단 더 덜컥 내려앉았다. 다만, 하준이의 피부가 건조하기도 하고 두터운 각질도 있어서 테스트 기구를 제대로 피부에 붙이지 못하고 진행했는데 이 때문일 수도 있다고 했다. 퇴원 후 추후에 청각테스트를 한번 더 받아야 할 것이며 그때가 되면 또 상황이 달라져서 통과할 가능성도 있다고 했다.
간호사가 계속 말하길, 피부과의사와 유전학의사의 요청으로 하준이의 등 피부 일부를 떼어 조직검사를 의뢰했단다. 피부를 떼어냈다니. 우리는 화들짝 놀라서 간호사를 쳐다봤다. 간호사가 하준이를 인큐베이터에서 꺼내서 안고 하준이를 감싸고 있던 담요를 풀어내 보여줬다. 하준이의 좌측 허리 아래쪽에 피부 3-4mm를 절제한 흔적이 있었다. 슬쩍 절제부위를 덮고 있던 거즈를 들추어 보니, 안 그래도 조그만 몸에 선명한 핏기 가득한 생채기가 있었다. 그 어리고 작은 아이가 엄마 아빠도 없는 사이에 그런 일을 겪었다고 하니 혼자서 얼마나 아파했을까, 혼자서 얼마나 울었을까 마음이 쓰라렸다. 간호사는 조금 급박하게 조직검사를 신청했으니 늦어도 2주 안에는 정확한 병명이 나올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 2주는 너무나 더디게 흘러갔다. 검사결과를 기다리는 시간은 길어져가고 있었고, 매일 병원으로 가는 발걸음은 점점 더 그 무게를 더해가고 있었다. 조직검사의 결과를 봐야 정확한 병명을 알 수 있을 테지만, 여전히 내 마음속엔 이미 incurable이라는 단어가 선명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나 자신이 그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지 회피하고 싶어 하는지도 분간이 안되었다.
하준이가 어린이 전문병원으로 이송되어 신생아집중관리실에서 머무른 지 어느 듯 3주가 다 되어 가는 어느 날, 우리는 처음으로 유전학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다. Dr. Spiro라는 의사였다. 각자 인사를 하는데, 의사의 손에 들린 제법 두툼한 종이 뭉치가 눈에 띄었다. 의식하지 않으려 했지만 계속 시선이 갔다. Dr. Spiro는 우리에게 조직검사 결과가 나왔다고 했다. 나와 아내는 눈빛을 교환했다. 가벼운 끄덕임으로 의사에게 들을 준비가 되었다고 신호를 보냈다. 의사가 입을 떼려 했다. 순간 공기가 바뀌었다. 긴장이 됐다. 내 손을 잡는 아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 역시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서로 꼭 쥔 손에서 미세한 떨림이 전달되었다. 고요한 병실 안에서는 눈치 없게 의료기기들만이 규칙적인 잡음을 내고 있었다. 간호사는 자리를 비켜줬고, 하준이는 새근거리며 자고 있었다. 얼어붙듯 멈춘 것 같은 짧은 시간이 지나고 의사가 하는 말이 귀에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