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선증후군(KID Syndrome) 아이와 함께 걷는 삶(1)
부랴부랴 아내의 퇴원절차를 밟고, 아직 잘 걷지도 못하는 그녀를 부축하여 차에 몸을 실었다. 병원관계자들이 뭐라 뭐라 말을 하는 것 같았는데, 내 귀에 제대로 들리는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운전대를 더듬다가 허공에 몇 번 의미 없이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한 후, 급하게 주차장을 빠져나와 곧바로 다른 병원으로 향했다. 우리 아이가 이송됐다는 그 병원으로. 마음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이틀 전 깊은 새벽, 아내는 첫 아이를 출산했다. 예정보다 4주가량 빠른 출산이었다. 갑작스러운 환경변화와 영국에서 미국으로의 이주 등 힘든 일들이 겹쳐 스트레스를 받아 일찍 산고가 찾아온 듯했다. 아내의 첫 진통이 오기 시작했을 무렵 나는 급하게 출산 가능한 인근병원을 찾기 시작했다. 쉽사리 되지 않았다. 이제 막 미국으로 온 의료보험 없는 이방인에게 다들 난색을 표했다. 현금으로 한꺼번에 계산할 경우에는 그 금액이 우리의 예산을 훌쩍 넘겼다. 나 역시 새로운 석사과정 공부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지만, 그 적응에 투자하는 시간과 노력조차 사치로 여겨졌다. 결국 많은 통화와 방문 끝에 한 병원을 찾았다. 진통이 조금 더 심해지는 어느 깊은 새벽 나와 아내는 병원 문을 두드렸다. 병원은 으슥한 곳에 있었고, 허름했고, 이방인들이 마음 편히 그 문을 두드리기에는 초가을 새벽의 짙은 어둠에 가려 무섭기까지 했다. 그런 두려움을 밀어젖히고 들어간 애틀랜타메디컬센터에서 30시간이 넘는 진통 후에야 아내는 우리 첫 아이, 하준이를 출산할 수 있었다.
오랜 진통 끝에 엄마의 몸에서 나와 세상을 마주한 하준이의 첫울음이 터졌다. 간호사들이 재빨리 그 작은 몸의 핏자국들을 닦아내고, 소독하고, 따뜻한 수건 등으로 감쌌다. 하준이의 정수리에는 제법 큰 상처들이 있었다. 의사는 출산 중에 일어날 수 있는 흔한 일이다라며 우리를 안심시키고는, 아이를 안고서 자세히 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여기저기 아이를 살펴보던 그의 표정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아이를 침대에 내려놓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고는, 하준이를 신생아집중관리실(NICU)에 보내야겠다고 말했다. 부모의 동의가 필요했다. 아무 정신도 없는 상태에서, 의료 용어들이 영어로 빠르게 쏟아지니 나와 아내는 뭔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의사의 모든 말에 동의를 해버렸다. 아주 잠깐 하준이가 아내의 품에 있을 시간이 주어졌다. 강포 사이로 언뜻 보이든 정수리의 큰 상처와 조금 거칠어 보이는 피부가 눈에 띄었다. 간호사는 옆에서 서서 아이들 데려갈 시간이라고 재차 언질을 주었다. 하준이는 세상에 처음 나와 아빠와 엄마의 품에서 여유 있게 머물 시간도 없이 신생아집중관리실의 작은 인큐베이터 안에 뉘이게 됐다.
아내는 출산실에서 한 시간 정도 더 있은 후 회복병동으로 옮겼다. 미국병원에서의 산후 식사란 한국과 많이 달라서 아내는 줄곧 얼음물과 주스 샌드위치 등을 먹으며 회복을 해야 했다. 간호사들은 분주하게 왔다 갔다 했다. 누워도 잠이 잘 안 들고, 대화를 해도 웃음기 없이 건조한 몇 마디가 오갔다. 말은 안 해도 같은 생각과 걱정을 했을 터. 혹여, 하준이가 큰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으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시계는 더욱 느리게 감겨나갔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간호사가 들어와 하준이를 면회할 수 있다고 해서 간신히 몸을 일으켜 신생아집중관리실로 갔다. 아내는 짚고 설 것이 필요해서 아래쪽에 바퀴가 달린 링거 스탠드를 의지하며 걸어갔다. 집중관리실로 가는 복도는 생각보다 길고 적막하고, 어두웠고, 그리고 무엇보다 낯설었다.
어두침침한 방에 형광등 몇 개가 켜져 있고, 대략 스무 개 정도의 인큐베이터가 1미터 간격으로 놓여있었다. 저 중 하나가 우리 하준이겠구나 생각하며 인큐베이터마다의 이름을 확인하며 방 안을 돌아다녔다. 우리가 찾아간 곳에 내 팔뚝보다도 작은 아기가 투명플라스틱 장 안에 누워있었다. 지난밤에 보았던 정수리의 상처에는 연고가 발라져 있었다. 호흡도 잘하고 다른 수치도 괜찮다고 우리를 안내한 간호사가 말했다. 염려했던 것보단 나은 상황이구나. 내일이면 이 아이와 함께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겠구나. 안도와 행복함으로 마음이 차분해지기 시작했다. 나와 아내는 눈을 마주치며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다시 더딘 발걸음을 옮겨 병실로 돌아왔다.
병실로 돌아와 잠시 쉬고 있는데, 인근 어린이전문병원(Children's Healthcare of Atlanta)의 의료진 3명이 우리를 만나러 왔다. 타 병원 의료진이 무슨 일인가 싶어서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보니, 지금 애틀랜타메디컬센터의 의사들이 판단하기로 우리 하준이가 정밀검사를 더 받아봐야 할 것 같아서 우리가 동의한다면 지금 이송절차를 밟겠다는 내용이었다. 방금 막 신생아집중관리실에서 하준이를 보고 왔고 또 간호사가 큰 이상이 없으면 퇴원할 수 있을 거라 했다고 말했지만, 의사들의 소견은 그와 다른 듯했다.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지만, 막 태어난 아이에게 정밀검사가 필요할 것 같다는 말에 섣불리 안 된다고 말할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아내가 걱정 어린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많은 대화가 우리의 눈빛 안에 오고 갔다. 정신없이 서류 서너 장에 연거푸 사인을 했다. 곧, 그들은 병실을 떠나 신생아집중관리실에서 하준이를 데려왔다. 그리고 우리에게 자신들의 병원의 이름, 주소, 연락처등이 담긴 서류를 건네주며 퇴원 후에 찾아오라고 말했다. 우리는 정말이지 몇 분 정도 스치듯이 하준이를 봤을 뿐이었다. 하준이의 인큐베이터가 담긴 의료용 카트가 떠나갔다. 문이 닫히고, 고요가 남았다.
그 이후, 우리는 마음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불안과 지금도 혼자 다른 병원에서 외로이 있을 우리 아이에 대한 걱정 때문에 아무것도 못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태어난 직후 봤던, 그리고 신생아집중관리실에서 봤던 하준이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이제 막 태어난 우리의 아기지만 사무치게 보고 싶었다. 누가 시간은 화살처럼 간다고 했던가. 그 화살 마치 부러지기라도 한 듯, 벽에 걸린 시계는 매초 힘들게 떨면서 초침을 움직였다. 가끔 퇴원 절차를 위해 간호사들이 병실에 왕래했을 뿐이었다. 퇴원과정도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모든 과정을 마치니 우리에게 남은 것은, 애틀랜타메디컬센터에서 하준이가 태어났다는 증빙서류 한 장뿐이었다. 그러나, 정작 아이는 우리에게 없었다.
마무리 퇴원수속을 하고, 차를 주차장에서 빼와서 아내를 태우고, 어제 받았던 병원주소를 내비게이션에 입력하고 서둘러 이동했다. 조수석의 아내는 힘겨워하고 있었다. 육체적으로도 심적으로도. 제대로 된 휴식과 회복 없이 지금까지 달려왔다. 영국에서 미국으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안정되지도 않았는데, 조기진통으로 병원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가구하나 없는 텅 빈 아파트에서 며칠을 보냈다. 겨우 병원을 잡고 그 병원 내에서도 오랜 진통 끝에 아이를 출산했는데, 그 아이에게도 정밀검사가 필요해서 다른 병원으로 이송되었다니. 이 모든 것이 불과 며칠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아내의 손을 잡는데, 힘이 없었다. 차가워지고 지친 손. 말없이 조금 더 힘을 줘 손을 잡았다. 그럴 때쯤 Children's Healthcare of Atlanta at Scottish Rite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의 도착시간은 늦은 저녁이었다. 모두 다 퇴근하고 남은 조용한 로비로 들어가서 어제 여기로 이송된 아기의 부모라 소개하고 병실을 안내받았다. 그 병실 또한 신생아집중관리실이었다. 긴 로비를 지나, 한 번 꺾고 또 제법 걷다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두어 층을 올라가서 내렸다. 그리고 문을 열고 들어가니 신생아집중관리실이 보였다. 어린이만을 위한 전문병원이라 그런지, 애틀랜타메디컬센터의 시설보다는 조금 더 아늑하고 깨끗했다. 하준이는 그 관리실 가장 안쪽의 큰 방을 혼자 쓰고 있었다. 그 방의 한가운데에 하준이가 놓여있었다. 간호사는 우리더러 손부터 씻고 오면 하준이를 안아볼 수 있게 해 준다고 했다.
손을 씻고 조금 더 자세히 아이를 볼 수 있었다. 나와 아내는 한 명씩 돌아가며 하준이를 안아보았다. 내 하박보다도 짧은 몸, 그 몸을 내 품에 가까이 붙여 말없이 꼭 안았다. 간호사는 아직 어떠한 검사도 구체적으로 하지 않았기에, 아무것도 알 수 없다고 했다. 다만, 약간의 황달증세가 있어서 어떤 형광등을 설치했고, 우리가 도착 전에 피부과 의사가 다녀갔는데 그 의사가 말하길 어떤 병이 의심된다고 했다고 전했다. 그러곤, 하준이를 감싸고 있던 수건을 벗겨 그 등에 붙어있던 딱지 같은 것들을 보여줬다. 나와 아내는 예상치 못한 모습에 조금 당황했다. 그리고 그런 우리의 모습에도 아랑 곳 없이 생전 처음 듣는 병명과 의학용어가 귀에 쏟아졌다. 이때에는 그 병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혹시 아이가 많이 아픈 걸까라는 걱정과, 이 넓은 병실에 이 어린 생명이 혼자 이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에 대한 미안함에 너무 마음이 아팠다.
간호사가 말하길 앞으로 짧아도 2주 정도는 하준이가 병원에 있어야 한다고 했다. 각종 검사를 할 것이고, 여러 의사가 와서 확인할 것들이 있다고 했다. 또한 아무리 부모라도 신생아집중관리실에 부모가 거주할 수는 없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또 잠시 하준이와 이별해서 집에 가야 했다. 다만 가기 전에 모유를 미리 유축해 놓으면 병원에서 보관하고 있다가 아이에게 우유가 아닌 모유를 시간 맞춰 줄 수 있다고 하기에, 아내는 옆에 따로 마련한 수유실에 들어갔다. 난 아내가 유축을 하는 동안 약 30여분 정도 하준이를 품에 안고 병실의자에 앉아 기다리기로 했다. 제법 푹신한 의자에 기대어 앉아 내 품에 안긴 하준이를 가만히 보았다.
간호사도 자리를 비켜주고, 병실의 센서도 사람의 움직임이 없어지자 조명을 어둡게 만들었다. 오롯이 나와 하준이의 시간. 팔에 살짝 힘을 주어 조금 더 꼭 안아보았다. 손가락으로 이마를 쓸어보기도 하고, 가슴팍을 토닥여도 보았다. 그러고 보니 우리의 첫 만남이 너무나 급박하게 흘러간지라, 이 귀한 아이에게 제대로 된 인사 한 번 하지 못했다. 안녕. 하준아. 나지막이 말해봤다.
삐. 삐. 삐. 한 구석에서 의료기기들이 일정 간격으로 내는 소리만이 조용한 병실을 울렸다.
안녕, 하준아. 우리 빨리 집에 가자. 빨리 아빠 엄마랑 같이 가자. 너 괜찮을 거야. 아픈 데 없을 거야.
삐. 삐. 삐.
하준아. 눈시울이 붉어졌다. 난 내 새끼손가락을 하준이의 동전만 한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하준이는 마치 온 힘을 쥐어짜듯 몸을 한번 펴더니 내 손가락을 포옥 쥐기 시작했다. 그 작은 손아귀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이미 붉어졌던 내 눈은 흐려지기 시작했다. 나도 그 손가락을 잡고 기도하듯 말했다.
그래, 아빠야. 무슨 일이 있어도 아빠가 널 지켜줄게.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아이를 내려놓지 않으면, 내 눈물도 멈출 것 같지 않았다. 훌쩍이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하준이를 뿌연 형광등아래의 인큐베이터에 내려놓았다. 잠시 후, 아내가 수유실에서 나왔고 나의 붉어진 눈가를 보았으나 이미 나의 마음을 다 알고 있기에 모른 척해주었다. 우리는 지난 3일간 잘 씻지도 못하고, 잘 먹지도 못하고, 지칠 대로 지치고, 막 출산한 산모요 그녀의 남편이었지만, 생후 이틀 된 또한 아플지도 모르는 하준이를 이 자리에 두고 가야 했다. 그 사실이 우리를 더욱 힘들게 했다. 안 떼어지는 발걸음을 억지로 떼어 집에 가야만 했다. 그래야 내일 또 이 믿기 힘든 현실을 또 마주하고, 또 하준이를 보러 올 테니까. 그러나, 그때만 해도 난 몰랐다. 하준이가 그 인큐베이터에 누워있는 동안 내 생애 가장 심장이 무너지는 소식들만 듣게 될 것을.
하준이는 이후 24일을 이 병원에서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