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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먼트 Jun 13. 2024

KID Syndrome

어린선증후군(KID Syndrome) 아이와 함께 걷는 삶 (4)

위암, 대장암, 췌장암 등 암이라는 병도 수많은 세부가지로 분류가 가능하듯이, 어린선증후군도 그러하다. 할리퀸 증후군, 비늘증, 성염색체 우성 증후군, 등. 그리고 그 많은 어린선증후군의 종류 중에서 하준이는 KID Syndrome으로 최종진단 되었다. KID라니 왠지 어린아이 같고 귀여워 보이는 이름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잔인한 증후군이다. KID는 Keratitis-Ichthyosis-Deafness의 줄임말인데, 우리말로 쉽게 말하자면 '각막염-어린선-청각손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백만 명 중 몇 명 꼴로만 나타나는 매우 희귀한 질병이며, 그 치료법 또한 완전히 정립되지 않은 상태이다. 지난 글 중 하나에서 언급한 피부과의사 Dr. Cox가 설명한 대로 현재로서는 incurable(불치)이다. 


여러 복잡한 의학적인 설명을 차치하고 쉽게 설명하자면, 어떤 염색체의 특이발현으로 인해 눈과 피부와 청력에 이상징후가 발생할 수 있는 병이다. 그 중 눈의 심각성으로 말하자면 실명에까지 이를 수 있고, 피부의 미흡한 관리는 감염에 의한 사망에 이를 수 있으며, 청력이상은 경우에 따라 완전한 청각손실까지 이를 수 있는 매우 무서운 증후군이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이를 병으로 불러야 할지 증후군으로 불러야 할지 헛갈리는데, 그 이유는 증후군이라고 하기엔 KID Syndrome이 우리 가족의 삶에 미친 영향이 그 어느 질병의 파급력도 상회하는 이 증상을 적절히 표현한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준이가 어떻게 이러한 증후군을 갖고 태어난 것일까. 유전학의사인 Dr. Spiro는 하준이의 염색체가 아내와 나의 염색체 조합 중에서 약 1% 미만의 확률로 나올 수 있는 조합이라고 했다. 대략 0.5% 에서 1% 사이. 물론 미리 알고자 했다면 현대의학의 도움으로 임신 중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대표적으로 양수검사 등으로 알 수 있었겠지만, 설령 알았다고 했던들 안 좋은 선택을 할 우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언젠가 이 생각을 아내와 공유한 적이 있다. 우리가 하준이의 병을 임신중에 알았다고 해도, 혹여 이 생명을 포기 했을까. 우리의 결론은 확고한 'No' 였다. 이는 단지 우리의 도덕적 기준이 높기 때문이 아니다. 지금껏 같이 지내오면서 부대끼면서 살아오면서, 이 멋진 아들 녀석이 우리에게 주는 행복이 이 무시무시한 증후군의 고통보다 크기 때문이다. 


더욱이 우리가 하준이를 임신했음을 알게 되었던 때는 우리가 영국에 거주하고 있었을 때였다. 생각해보자면, 영국의 의료체계에서는 그런 전문적인 검사가 용이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영국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의료혜택이 무료로 주어지는 나라이지만, 그 보편적 혜택에 반비례해서 모든 사람들이 양질의 진료 및 검사를 받긴 힘들었기 때문이다. 임신초기 유학생 신분이었던 우리는 그 무료로 제공받는 기초검사들에도 감사해했었다. 그러니 양수검사 등 공공의료혜택의 범위를 넘어서는 산전검사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미국으로 건너와서는 상황들이 더욱 급박하게 흘러갔고 아내의 출산에 이르는 시점까지 우리는 제대로된 검진조차 받지 못했다. 


그러나, 상황을 묘사하자면 그랬다는 것일 뿐, 우리의 염색체 조합에 이미 그러한 가능성이 내재되어 있었고, 또 그 1%보다 적다는 좁은 가능성으로 하준이가 KID Syndrome을 지니고 태어났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일종의 원죄의식을 씌워주기에 충분했다.




의사의 설명은 계속되었다. KID Syndrome을 지니고 태어나는 아이들마다 증상의 경중이 모두 다 다르고, 다행히도 하준이의 경우,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의료진들이 이상함을 발견했고 곧 어린이전문병원으로 이송되어 올 수 있어서 최초의 극단적인 위험에서는 벗어난 상황이라고 했다. 이 증후군은 피부형성과 재생에 큰 영향을 미치는데, 외부 감염에 매우 취약해서 아주 어린 시기에 피부에 감염이 되면 살기가 매우 힘들어질 수도 있다고 했다. 후에 안 사실이지만, 이 KID Syndrome 환자 중에서 이러한 피부감염으로 인해서 생후 1년이 채 못되어 생을 마치는 아이들도 있다고 한다. Dr. Spiro는 앞으로 지속적으로 눈과 귀의 검사 및 유전학 파트와의 협업도 필요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자신은 아마도 1년에 한 번 정도 우리와 만나면서 향후 관리에 대한 전반적인 설계를 해나갈 것이라 했다. 그러고는 명함과 손에 쥐고 있던 서류를 주고 병실을 떠나갔다.


그 서류는 하준이의 조직검사 결과지였다. 하준이의 염색체 정보가 KID Syndrome 조건에 부합한다는 내용과 향후 하준이가 지속적으로 방문하고 치료를 진행해야 할 부서 및 의사들의 명단이 나와 있었다. 나에게 어린선증후군에 대해 알려주었던 Dr. Gregory Cox도 그 명단에 포함되어 있었다. 유전학을 필두로 피부과, 소아과, 이비인후과, 청각학 등 많은 관계 부서가 하준이의 관리를 위해 포함되어 있었다. 다행히도 대부분 어린이전문병원인 Children's Healthcare에서 일하거나 산하 네트워크에 속한 의사들이어서 지속적인 Follow-Up이 용이해 보였다. 사실 용이해 보였다 해도, 엄두가 안 날 정도로 많은 세부사항에 막막함도 따라왔다. 1주 정도 뒤에 퇴원 후 우리가 해야 할 첫 번째 과제는 소아과를 등록하고 피부과에 예약을 잡는 일이었다. 서류에서 확인한 내용을 아내와 함께 이야기하고, 우리는 다시 하준이의 인큐베이터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밖에서 기다리던 간호사도 우리의 모습을 보고 슬몃 따라 들어왔다.


의사로부터 들은 정보 그리고 내 손에 쥐어져 있던 서류뭉치에 담긴 정보가 무색하게 하준이는 아름다웠다. 이 아름다운 아이가 앞으로 살아갈 인생에서 그 귀한 생명과 더불어 남과는 다른 출발지를 주었다는 자각에 이르자 내 마음은 아빠로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독한 각오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내가 아무리 힘들어도, 이 아이보다 힘들진 않을 테니까. 내가 아무리 애달퍼도 이 변하지 않는 현실을 싸워나갈 최전선에 이 아이가 있을 테니까. 난 앞으로 지치면 안 될 것이다. 슬프면 안 될 것이다. 버텨내고, 기초를 닦고, 아 아이가 디딜 발판을 마련해 줄 것이다. 입술을 자근 깨물었다. 아내가 하준이를 안아보는 내내 난 나 스스로에게 이 마음을 주입했다. 간호사는 다시 분주하게 자신이 할 일을 시작했다. 아내에게 유축을 권하고, 그에 따라 나는 하준이를 안아 들었다. 그렇다. 세상이 무너지는 소식을 들었어도 지금 할 건 해야 하는 것이다. 


KID Syndrome이 보일 수 있는 증상들 중에 우리가 가장 빨리 눈치챌 수 있던 건 단연 하준이의 피부였다. 내 품에 안긴 하준이의 피부는 매우 거칠었고 건조했으며 머리카락 한 올이 없었다. (당시에는 안일하게도) 머리카락이야 성장하면서 날 수 있겠거니 생각했지만 두꺼운 각질로 뒤덮인 머리와 등 그리고 팔과 다리 등은 우리의 걱정거리였다. 각질들의 형상들 또한 몸의 부위마다 판이했다. 어떤 부분은 노랗게 두꺼운 각질층으로 덮여 있었고, 어떤 부분은 매끈하긴 해도 자세히 보면 비늘 같은 형상이 보였다. 생후 3주의 어린 하준이는 그 부분들이 가렵거나 간지러운지 종종 몸을 비틀고 이불을 휘감았다. 간호사들은 규칙적으로 Dr. Cox가 처방해 준 로션과 연고 등을 하준이 몸에 도포했다. 그중 한 종류는 딱지가 몸에서 분리될 수 있게 도와주는 연고였고, 다른 한 종류는 피부재생에 도움이 되는 약이었다. 둘 다 어느 정도 스테로이드가 함유되었던 약제들이었다. 처방 없이는 살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스테로이드를 함유한 연고들이었지만, 효과는 제법 즉각적이었다. 병원에 있는 동안에도 하준이의 딱지 중 일부는 떨어져 나갈 기미를 보였다.



Dr. Spiro와의 만남 이후 며칠 동안 꼼꼼히 쳐다봤지만 다행히도 신생아청력검사를 통과하지 못했다는 점 외에 청력 쪽에서 다른 이상증상들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통과하지 못했다던 그 검사결과마저도 조금은 의심스러웠다. 모든 소리에 반응하진 못했어도, 간간히 하준이는 우리의 목소리에 반응하고 눈을 맞추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하준이 주변에서 이야기할 때면, 이 아이의 희미하게 웃는 듯한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도무지 들리지 않는 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추후에 나가서 재검사를 하면 청력검사를 통과할 수 있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이는 반복되는 안 좋은 소식에 줄곧 내리막을 걷던 나와 아내의 마음에 조금은 쉴 지점을 마련해 주었다.


시력 쪽으로는 전혀 문제를 느낄 수 없었다. 하준이는 우리와 계속 눈을 맞추었고, 그 맑은 눈동자에 비친 우리의 모습은 너무나도 선명했다. 난 세상의 그 어떤 때도 묻지 않았던 그 눈을 사랑한다. 하준이의 그 순수한 눈빛은 온갖 이성적인 방법으로 고요함을 유지하려고 했던 우리 마음에, 눈물을 떨구기에 충분했다. 우리는 하준이를 우리 눈 안에 계속 담았다. 병원에서의 짧은 시간 동안  담아 놓을 수 있을 만큼 담아놔야 집에 가서 그 모습을 생생히 기억하며 살아낼 수 있었다.


여전히 Dr. Spiro가 구두와 문서로 경고했던 모든 내용들이 날카로운 유리로 쓴 글씨처럼 우리의 마음에 선명하게 남아있었지만, 우리는 매 순간 이 잔인한 증후군이 가져다 줄 가능성 등을 부인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최선을 다해서 부정하고 있었다. 쓰인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그리고 벌써부터 성숙하고 태연하게 삼켜내기엔 나와 아내에겐 생경하고도 쓰디쓴 현실이었다. 그 와중에 하준이의 퇴원의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아내와 나는 종종 퇴원 후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무엇이 필요할지 어떤 일부터 진행해야 할지 의논했고,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 가며 현실로 나갈 준비를 했다. 부정만 해서는 더더욱 답이 없을 현실이었다. 두려웠다. 하지만 지켜내야 할 생명이 있었고, 살아내야 할 또 다른 하루가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의 삶은 그렇게 살아지고 있었다. 닥쳐오는 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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