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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기 Aug 07. 2024

<그녀에게 가는 길>

동궁과 월지에서 별을 마주하다.

 2학기도 거의 끝나 방학식이 예정된 12월의 마지막날, 난 무난하고 지루한 삶과의 이별을 결심했다. 교장선생님을 찾아가 더 이상 계약 연장을 하지 않겠음을 갑작스럽게 통보했다. 교장선생님께서는 당황하신 듯했다. 곧이어 혹시 다른 학교에 갈 생각이냐고, 아니면 본격적으로 임용고사 공부를 할 거냐고 조심스럽게 물어보셨다. 임용고사 공부를 하겠다는 거짓말을 둘러댔다. 평소 나의 성실한 근무 태도를 눈여겨보시던 교장선생님께선 혹시 임용고사 준비가 잘 안 되면 다시 학교로 찾아오라고 하셨다. 교장선생님의 말씀이 단순히 형식적인 건지, 진심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라도 그렇게 건네주는 교장선생님이 진심으로 고마웠다. 교장선생님께선 그래도 2월 말까지는 계약 기간이니 혹시 학교에 나와서 근무할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다고 하시길래 알겠다고 대답했다. 혹여나 방학에 나올 일이 생길지라도 짐을 모두 뺄 예정이다. 학급 아이들의 생활기록부 마무리 작업이 다 안되었다는 점이 맘에 걸렸지만 집에서 작업하면 그만이다.


 교장선생님과의 짧은 독대를 끝내고 교무실 내 자리로 돌아와 사무실 책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짐을 싸고 있는 사이 CCTV가 찾아와 휘둥그레한 눈으로 왜 물건 정리를 하냐고 물어 왔다. 임용고사 준비로 인해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다는 나의 대답에 CCTV는 임용고사 티오가 갈수록 줄고 있다며, 학교를 그만두고 공부에 올인하는 것은 너무 위험한 도박이라며 내 선택에 대한 염려의 눈길을 보냈다. 나의 계약 종료는 이 학교에서 정식 교사가 되고 싶은 CCTV에게는 하나의 호재가 될 수 있었다. CCTV입장에서는 내가 나가줘야 본인이 정식 교사를 차지할 확률이 높아질 테니 내가 퇴사하는 게 그에게는 나쁜 패는 아니었을 것이다. CCTV는 더 이상 날 만류하지 않고 자기 자리로 발걸음 가볍게 돌아갔다. 비록 경쟁 관계였지만 난 CCTV가 정식 교사가 되었으면 했다. 나 못지않게, 혹은 나보다 더 많이 학교에서 서러운 눈칫밥을 먹으면서 끈질기게 버텨온 그의 지난 삶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어찌 됐든 그동안 고마웠어. 오대준 선생. 당신과 함께 살아왔던 을의 삶도 썩 나쁘진 않았어.  


 아연샘이 어느새 다가와 내 짐을 꾸리는 걸 묵묵히 도와주었다. 생각해 보니 기간제 교사 생활을 하면서 그나마 아연샘이 있었기에 나의 학교생활은 덜 외로웠던 것 같다. 내가 서러운 일을 당했을 땐 누구보다 서러워해 주고, 내가 기운이 빠져 있으면 먼저 다가와 농담을 건네줬던 사람. 아연샘 덕분에 내가 버틸 수 있었어. 그리고 고마워. 나란 사람을 좋아해 줘서. 아연샘은 CCTV와 달리 내 미래에 대해서 굳이 묻지 않았다. 아마도 내가 가야 할 길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눈치였다. 짐정리를 어느 정도 마치자 아연샘도 한숨을 돌리며 말을 건넸다.


"학교 나가게 되더라도 연락은 하고 살 거지?"

"그럼. 물론이지. 언제든지 연락해."

"먼저 연락하겠다는 말은 아니네."

"아니, 연락할게. 주변이 정리가 되면."

"꼭 연락해. 결혼식 때도 청첩장 주는 거 잊지 말고."

"결혼은 무슨. 아연샘이나 좋은 사람 만나."

"좋은 사람 만나라는 말보단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는 건 어때? 수남샘 같은 사람 말이야."

"난 그렇게 좋은 사람이 못돼. 아연샘은 좋은 사람이니까 분명 좋은 사람 만날 거야."

"수남샘 연애나 신경 써. 난 자유연애론자이고 만날 남자도 많으니 걱정하지 말고."

"그래."


 아연샘이 꺼낸 결혼식이란 단어가 낯설지 않게 들렸다. 난 자연스럽게 선주를 떠올렸다. 그녀와 나란히 서서 그녀의 고운 손을 붙잡고 주례사를 듣는 장면을 상상해 봤다. 과연 현실이 될 수 있을까. 아니, 그녀 곁에 나란 존재가 가당키나 할까. 그녀가 보낸 둘기네집은 먹고살 궁리에만 취해 있었던 내 초라한 현실 의식을 각성시켰다. 그녀에게 닿기 위해서 내가 뭘 해야 하는지도 대충 감을 잡았다. 그녀가 둘기네집을 나에게 보낸 의도는 아마 내 진짜 꿈을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내가 알을 깨고 나와 하늘을 향해 날갯짓을 하며 날아오르는 것을 원했을 것이다. 둘기네집을 내게 보낸 이후 그녀에게서 따로 연락이 없었다. 그리고 그 둘기네집을 통해서 신화 속에서만 머물던 과거의 비밀이 밝혀졌다. 그녀에게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열쇠는 둘기네집에 담겨 있었다. 이제 꽁꽁 묶여 있던 운명의 자물쇠를 풀 차례이다.


 방학식이 있는 날이라 일찍 퇴근을 했다. 그동안 신세를 졌던 선생님들께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무게가 별로 나가지 않는 짐상자를 든 채 교문을 나섰다. 학교를 나오니 홀가분해지는 느낌이다. 이제 내 삶을 구속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 부모님께는 모아둔 돈이 있으니 임용고사 준비를 진지하게 해 보겠다고 둘러다면 될 것이다. 당분간 마음을 추스르고 오로지 쉬고 싶은 마음뿐이다. 마음이 차분해지면 혼자만의 여행을 떠날 계획이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짐상자를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치고 침대에 내 몸을 파묻었다. 잠이 들었다. 얼마 정도 잤을까. 이른 저녁, 잠에서 깨자마자 여행 목적지를 정했다. 경주이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잠에서 깨어 보니 꿈의 대부분의 장면은 삭제가 되었는데 경주라는 작은 기억의 조각이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 그 작은 기억의 조각엔 달콤하고 알싸한 느낌이 코젤 다크 유리잔의 시나몬처럼 묻어 있었다. 꿈에 경주가 왜 나왔는지는 무의식에게 따져봐야겠지만 굳이 여행지를 찾아야 하는 번거로움을 피한 것 같아 한결 기분이 가벼웠다.


  일주일 후 아침, 잠에서 깨자마자 등산용 가방에 대충 옷가지와 필기도구 등을 챙겨 넣고 경주로 가는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경주로 가는 버스 안에선 미리 챙겨 온 카뮈의 <이방인>을 드문드문 읽다가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것 같아 이내 책을 덮었다. 경주에 도착하자마자 예약해 두었던 낡고 허름한 모텔에 짐을 풀고 가방엔 필기도구만 넣은 상태로 대릉원 거리로 2킬로미터쯤 걸어갔다. 겨울이었지만 늦가을에 가까운 날씨여서 산책하기엔 적당했다. 대릉원 앞에 있는 밀면집에서 늦은 점심을 간단하게 해결하고 티켓을 끊어 대릉원 안으로 입장했다. 평일 오후였지만 경주라는 관광도시의 특성상 대릉원 안은 각 도처에서 몰려온 관광객들로 붐볐다. 가족 단위의 단란한 행렬, 오붓한 연인의 행진, 혼자서 여행온 듯한 사람들의 행군. 나 역시 혼자였지만 경주는 혼자서 여행 왔다는 게 전혀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모든 사람을 포용해 주는 도시 같았다. 야트막한 언덕 같아 보이는 무덤들은 천년고도 경주의 상징이자 시그니처였다. 무덤들의 각기 다른 사이즈는 그 무덤의 주인이 생전 얼마나 대단하고 높은 사람이었는지 드러내 주고 있었다. 한 바퀴를 휙 둘러보고 나서 그늘이 깔린 벤치에 앉았다. 가방 안에서 예전에 술에 취해 샀었던 브레인스토밍 노트와 필기감이 좋은 펜을 하나 꺼내 들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지금 날 감싸고 있는 모든 감각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지금 나는 경주에 왜 와 있는 것일까? 날 경주로 이끈 무언의 힘의 정체는 무엇일까? 바람을 타고 흐르는 풀잎 소리, 어린아이들의 운동화 발자국이 하나하나 지면을 두드리고 스치는 소리, 단체로 관광을 온 듯한 할머니들의 구수한 사투리 소리, 피부에 전해지는 겨울의 서늘한 온도와 싸늘한 감각. 노트를 펼쳐 백지의 페이지에 펜을 끄적거렸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이곳.

세상을 먼저 살다 간 이들의 흔적이 무덤처럼 남겨진 곳에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저들은 생의 활력을 분수처럼 내뿜고 있다.

난 대릉원에 우두커니 앉아 사람들이 일으키는 생의 물보라를 맞으며 어찌 보면 내 운명을 건 무모한 도전의 장엄한 출발을 알린다.

실패할 수도, 성공할 수도 있는 나와의 사투이자 운명과의 전면전.

승리할 것인가. 패배할 것인가.

난 나비가 될 수 있을까.

창공을 자유로이 비행할 수 있을까.

마른땅에서 힘겹게 꿈틀대는 애벌레를 먼 하늘에서 내려다보며 안도할 수 있을까.

힘겨운 날갯짓의 끝엔 그녀가 서 있기를. 그녀에게 닿을 수 있기를.’     


 몇 글자 끄적이고 난 후 노트를 다시 가방에 집어넣고 첨성대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경주의 하늘은 한 폭의 정교한 풍경화에 나올 만큼 선명하게 맑았고 구름도 적당한 양으로 하늘빛을 더욱 도드라지게 보조하고 있었다. 날씨가 워낙 좋아 킥보드와 자전거를 타면서 첨성대 근방을 배회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킥보드와 자전거를 대여해 주는 가게가 많았지만 난 천천히 걷는 걸 선택했다. 걸음보다 더 빠른 이동수단을 선택한 무리들을 이리저리 피해 가며 첨성대 인근에 조성된 근사한 산책로를 따라 사유하는 칸트처럼 걷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이후로 첨성대는 2번째 방문이었다. 첨성대는 그대로였지만 첨성대 주변엔 산책로와 꽃밭이 깔끔하고 세련되게 조성되어 있다는 점이 그때완 다른 부분이었다. 신라인들은 정교하게 쌓아 올린 저 돌무더기 속에서 우주를 보았다지. 그들이 본 우주는 어떤 모습으로 그들에게 그려졌을까. 나에게 선주는, 선주는 나에게 어떤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는 걸까.     


‘나의 우주에 떠돌던 사랑의 항성이 어느 순간 폭발하여 너라는 블랙홀이 만들어졌어.’   

   

 이렇게 한가로이 나만의 시간을 가져보는 게 실로 얼마만일까. 교사 생활을 할 때도 방학이라는 구실 좋은 연휴 기간이 있었지만 정식 교사를 꿈꾸는 기간제 교사에게 방학이란 거의 무의미했었다. 계약 연장을 위해 방학 때도 매일매일 출근하여 높으신 분들께 눈도장을 찍었으니까. 문득 학교생활을 그만뒀다는 현실 감각이 연무처럼 피어올랐다. 짐을 꾸려 교문 밖으로 나서면서 아쉬움이나 후회 따위는 하지 않기로 했다. 난 내 길을 찾은 것이다. 막스 데미안이 말한 것처럼 어떤 짐승이나 사람이 자신의 모든 주의력과 모든 의지를 어떤 특정한 일로 향하게 하면, 그는 그것에 도달한다고 했던 말을 믿어보기로 했으니까. 내 안의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바짝 기울이기로 결심했으니까. 진짜 나를 찾기 위한 여행은 시작되었다.   

  

‘아폴론 세계와 디오니소스 세계의 끝없는 투쟁. 난 결국 아폴론에게 양해를 구하고 디오니소스 세계에 입장하기로 결심했지.’      

 

 밥벌이도 사라진,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내 삶을 그녀는 아무런 대가 없이 받아줄 수 있을까. 그녀와 나의 이야기는 과거 속 신화로만 머물 것인가, 혹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스케치일까. 그녀와 함께 우리의 삶의 그림을 완성할 수 있을까. 오로지 내 머릿속은 그녀라는 신화적 존재로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닿을 수 없도록 닿고 싶어. 더 이상 손을 뻗지 않아도 닿을 수 있을 만큼, 네가 내 곁에 더욱 가까이, 그리고 영원히 존재했으면 좋겠어.’   

  

 오로지 그녀를 향한 상념에 빠진 채 얼마나 걸었던가. 하늘은 점점 개와 늑대의 시간으로 채색되어 갔다. 김유신 장군의 백마처럼, 내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동궁과 월지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매표소에서 표를 끊어 동궁과 월지에 들어서자 수많은 인파가 벌써부터 연못 곳곳을 점유하고 있었다. 야경이 유명한 곳이라 발 디딜 틈도 부족할 만큼 동궁과 월지는 마치 인간 철조망을 쳐 놓은 것처럼 각양각색의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북적이는 인파 속으로 섞여 들어가기 싫었다. 하지만 먼 길을 달려 입장료까지 내고 들어온 만큼 그냥 돌아가기도 싫었다. 좀비를 피하듯 조심조심 인파 사이를 헤집고 다녔다. 중간중간 사진을 찍는다고 멈춰 선 사람들이 있는 바람에 나의 행군 속도는 더디기만 했다.    


‘내 남은 삶 역시 순탄하지 않겠지. 출구가 안 보이는 길 한가운데에 서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난 지금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이 길의 끝엔 무엇이 날 기다리고 있을까.’    

 

 동궁과 월지 둘레길의 절반쯤 걷다 보니 누각과 돌담의 특정 포인트에 점차 점등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사람들이 야경 명소로 동궁과 월지를 추천하는 데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빛으로 무장한 동궁과 월지는 황홀하고 운치 있었다. 점차 싫증이 나려던 차에 지친 마음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사람들도 가던 길을 멈추고 점등으로 인해 더욱 화려해진 경관을 각자의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나 역시 풍경에 도취되어 카메라 렌즈에 장면 하나하나를 담기 시작했다.      


‘내 삶을 밝혀 줄 별은 어디에 떠 있는 것일까. 저 하늘엔 저리도 무수한 별이 떠 있는데. 내 삶을 안내해 줄 별은 어디에서 빛나고 있는 걸까.’     


 출구 쪽을 얼핏 보니 밤이 되어 입장하는 관광객이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었다. 저 인파들이 날 잡아먹으러 오기 전에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걸음의 속도를 높였다. 사람들과 가벼운 접촉이 일어나긴 했지만 오히려 홀몸이라 기동성 있게 탈출이 가능했다. 둘레길도 끝났고 이젠 출구가 눈앞에 보였다. 그리고 내가 들어왔던 입구도 보였다.


 입구 쪽에서는 하나의 별이 이쪽을 향해 들어오고 있었다. 천상있는 하나가 천상에 싫증을 느끼고 지상으로 가출을 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별과 눈이 마주쳤다. 별빛이 내 온몸을 휘감는 바람에 그대로 몸이 굳어 버렸다.


 별에서 온 듯한 그녀와 마주쳤다.

 우린 서로의 거리를 서서히 좁혀 나가며 마주했다.

 빠르게 쿵쾅대는 심장 소리와 달리 발걸음은 차분하고 조심스러웠다.

 그녀는 눈이 부실 정도로 찬란한 빛을 눈망울 속에 머금고 있었다.

 그녀의 맑은 눈망울 안에 내가 담겨 있다.

 나의 투명한 눈망울 속에 그녀가 담겨 있다.


 "안녕, 변수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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